영화의 시작은 뻐꾸기의 생태로부터 시작한다.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가 아닌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다는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다. 그리고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본 주인의 알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젬마와 톰. 젬마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다. 톰은 목수 일을 하고 있다. 이 커플은 살 공간을 찾고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우연치 않은 기회에 특이한 부동산 중계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욘더'라는 교외지역의 주택단지를 소개시켜준다. 마치 마그리트의 화풍에서 본 것만 같은 색감과 구조의 집이 반복해서 펼쳐진다. 이 주택 단지에서 9호 집을 소개받은 커플은 이 집에서 괴이함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중계인을 찾았을 땐, 이미 중계인은 떠난 이후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부조리극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젬마와 톰은 아무리 마을을 벗어나려 해도 9번 집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밤이 되고 차의 기름이 모두 소진되어도 이들은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시지프스 신화>에서처럼 영원한 반복이 펼쳐진다. 이들의 탈출 시도는 계속된다.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시도한다. 시도하고 실패해도 시도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긍정 혹은 희망의 시도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소비하는 것뿐이다. 모든 시도가 좌절되었을 때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희망'를 확인하게 된다.
이 희망은 잔인하다. 집으로 순식간에 배달되는 음식으로 생을 이어나갈 순 있지만 삶을 이어나갈 순 없다. 이들은 이 무한이 계속되는 공간에서 사는 의미를 잃어간다. 그 와중에 아기가 배달된다. 택배로 도착한 아기와 함께 섬뜩한 멘트가 쓰여있다.
아기를 키우면 빠져나갈 수 있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아기를 키운다. 이 커플의 말을 빌려 이야기 하면 이 아이는 괴물이다. 성장 속도가 차원이 다르다. 또한 무언가를 아는 것 같다. 마치 이 마을에 대해 선험적으로 알고 태어난 것 같다. 행동이 그러하고 언어가 그러하다. 커플은 이 아이를 '보이'라고 부른다. 보이에게 살인충동을 느낄 만큼 스트레스를 받지만 차마 살해하진 못한다. 이들에겐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못한다. 톰만이 계속해서 이 마을을 벗어나려 땅을 판다. 땅을 판다고해서 탈출할 수 있다는 증거나 확신은 어디에도 없지만 땅을 판다.
영화는 이제 끝을 향해 달린다. 성인으로 자란 '보이'는 커플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톰은 땅을 파다 결국 죽는다. 젬마는 도망가는 보이를 추격하다 죽어버린다. 홀로 남은 보이는 '욘더'를 떠나 다시 현실의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새로운 부동산 중계인이 된다. 영화는 마치 부조리한 묘사를 통한 자본에 대한 비극을 시각화하는 것 같다. 이 젬마와 톰이 원했던 건 그저 살 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제공된 건 있어야 할 곳이었다.
생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 인간은 인간이 되지 않는다. 이 두 인물은 타인과 소통할 광장과 둘만의 삶이 부딪히는 밀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곳은 무한한 밀실이었다. 이 형용모순은 마치 자본주의의 아이러니를 시각화하는 것 같다. 복지를 통한 집, 식량, 그리고 양육을 위한 환경.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갖추어 졌다고 해서 이들이 완벽히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들의 선택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저 정해진 무한한 일상을 해치울 뿐이다.
이 무한한 일상을 견뎌내지 못해 톰은 땅을 판다. 자신의 죽음을 불러오는 이 기괴한 행위는 한순간 우연이 만들어낸 '희망'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왜 감독은 이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는가.
두 사람(감독과 각본가)은 2008년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된 부동산 시장 침체가 야기한 아일랜드의 유령 부동산에 주목하였고, "비슷한 모양의 주택 개발이 양자 현상처럼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을 발동시키게 된다.
감독의 의도를 조금 비약해보자면, 리멤브라더스 사태 이후 펼쳐질 새로운 '재해'를 영화적으로 표현했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문제는 생긴다. 우리는 분명 자본주의라는 '구조'안에 살고 있다. 이 구조는 마치 무한이 펼쳐질 시대와 같다.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현대 이전의 근대, 세계 2차 대전과 1차 대전, 산업 혁명 그리고 르네상스와 중세. 종교전쟁과 왕권의 변화. 그 이전의 수많은 변화와 격변의 시대. 등등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변화들이 엄존했다. 감독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 시스템은 그리 완벽하지 않다. 영화의 엔딩에서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커플이 중계인을 찾아와 이 반복을 영원히 반복하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의 이 추론이 과연 낭만적이기만 할까.
물론 이 지점을 비판하기 위해서, 혹은 실현되기 위해선 분명 특이점이라 불리만한 계기가 만들어질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역으로 이 가능성을 <비바리움>자체에서 찾는다. 영화를 보고 반론가능성을 찾았다는 것 그 자체가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의 결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그 가능성 자체가 변화의 시발점이라고. 그러나 뻐꾸기로 은유된 이 시대의 주체성은 우리가 현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질문은 영화는 남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