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BIFAN] <펠리컨 블러드> 유전자가 시키지 않은 '모성애'
[24th BIFAN] <펠리컨 블러드> 유전자가 시키지 않은 '모성애'
  • 오세준
  • 승인 2020.07.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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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펠리컨 블러드’(Pelican Blood, 독일‧불가리아, 2019, 121분)
감독 ‘카트린 게베’(Katrin GEBBE)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닉영화제
<펠리컨 블러드>,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닉영화제

<펠리컨 블러드>는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초이스: 장편' 섹션 초청작으로, '카트린 게베'(Katrin GEBBE) 감독이 연출했다.

 

사진 ⓒ 가디언즈
<도주하는 아이>, 사진 ⓒ Guardian
사진 ⓒ seattlescreenscene.com
<나는 집에 있었지만...>, 사진 ⓒ seattlescreenscene.com

영화 <펠리컨 블러드>에 대해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우선, 최근 국제영화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몇몇 독일 여성 감독들의 경향(또는 관심)에 대한 부분이다. 지난해 제6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분' 은곰상(Silver Berlin Bear)을 수상한 '노라 핑샤이트'(Nora FINGSCHEIDT) 감독의 <도주하는 아이 System Crasher>(2019)와 '감독부분' 은곰상을 수상한 '앙겔라 샤넬렉'(Angela SCHANELEC) 감독의 <나는 집에 있었지만… i was at home but...>(2019)은 흥미롭게도 '도망치는 아이', '불완전한 가족', '불안정한 부모의 심리' 등의 공통점을 가지며, 또 이 작품들은 '내러티브의 미완결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특히, 이 독일 여성감독들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불안정한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서 카메라를 끊임없이 흔들거나 조금도 미동하지 않도록 고정한다.

그리고 지난해 베니스와 토론토를 거쳐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 초이스 작품상'을 수상한 독일 여성감독인 '카트린 게베'의 <펠리컨 블러드> 역시 그러하다. 아니. 어쩌면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두 작품의 교집합한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야기가 엄마의 시선을 향해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나는 집에 있었지만...>을, 부모(보호자)와 아이의 관계를 면밀히 관찰하거나 '가정의 둘레 밖, 즉 사회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도주하는 아이>에 가깝게 느껴진다. 더욱이 세 작품은 '화합'과 '희망'을 담은 열린 결말을 관객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결을 같이한다. 또 '작품성'의 측면에서도, 이 세 작품은 독일 내에서도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유수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점까지 함께 한다.

 

'언캐니'(Uncanny)하다

<펠리컨 블러드>는 입양한 딸 '니콜리나'와 평화롭게 살아가는 말 조련사 '비프케'(Nina Hoss)가 불가리야에서 또 다른 딸 '라야'를 입양하면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을 그린다. 영화는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가지지만, 감독이 담고자 하는 비프케와 라야의 관계는 실상 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비프케의 내면을 이해해야 하는 수고와 '라야'의 존재를 괴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외상에 따른 정신적후유증을 겪는 아이로 보아야 하는지에 따른 의심 때문이다. 즉, '라야'를 통해 겪는 사건들이 비프케의 내면을 이해하는 단서인 동시에 '라야'의 존재가 괴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기에 관객의 시선은 불안정해지고 혼란스러울 밖에 없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엄마와 딸'인, 이 관계는 '공포인가 드라마인가'라는 영화의 장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관객인 우릴 낯설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언캐니함'을 자아낸다.

 

사진 ⓒ GFQ
사진 ⓒ GFQ

우선, '라야'를 입양하기 전 '비프케'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홀로 마장을 운영하는 '비프케'는 경찰 말을 훈련하는 전문 조련사다. 딸 니콜리나와 평화로운 아침을 보낸 그녀는 말의 훈련을 위해 경찰이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훈련 중 갑자기 '탑건'이란 말이 불안한 증세를 보이더니 위에 타고 있는 승마자인 경찰을 떨어뜨린다. 비프케는 곧장 탑건을 잘 달래기 시작하고, 말이 승마자를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조인 업'(Join-up, 말이 승마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시키는 조련 방식)을 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조인 업'에 대한 행위를 상당히 밀도 있게 담아낸다. 즉, 말이 승마자를 경계하고 두려워할 가능성과 그에 따라 승마자가 다시 말을 타서 떨어질 위험성이 공존하는 '조인 업'의 행위는 '공포와 두려움이 깔린 관계의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불안한 말의 움직임과 그런 말을 지켜보고 기다리는 승마자의 모습을 꽤 긴 시간 담아 내는 감독의 의도 역시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아야 함'을 카메라 또한 실천함에 있다.

그렇다. '비프케'는 '관계란 동물이든 사람이든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서로 간의 경계심과 두려움이 극복되어야 '신뢰감'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영화는 그녀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입양하는지, 왜 엄마(부모이자 보호자)가 되고 싶은지 등의 사연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 ⓒ FILM DIENST
사진 ⓒ FILM DIENST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시퀀스와 더불어 입양 딸 '니콜라야'와의 행복한 모습만으로 '비프케'는 충분히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영화의 시발점'은 '라야'의 등장과 동시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어쩌면 '엄마'(부모)라는 자질을 검증받거나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의 형태'라는 시선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어떻게 해쳐 나아갈 것인가'에 있다. 흥미로운 건 앞서 말한 물음이 관객에게 향하는 것(추론이나 추측의 형태)이 아닌, 감독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묻고자 하는 듯 자문자답식으로 영화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펠리컨 블러드>는 단순히 '관객'의 응시만을 필요로 하는 작품일까. 그렇지 않다. 재밌게도 관객의 시선은 이미 영화 안에 머물러 있다. 영화가 계속해서 진행될수록 관객인 우리가 동화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을 둘러싼 타인들의 존재'다. 이들은 친구나 애인 혹은 직장동료, 이웃 심지어 비프케의 딸인 '니콜리나'까지 해당될 정도로 포괄적이다. 말 그대로 관객 모두를 스크린 안으로 끌어넣는 꼴이다.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라야'는 아픔이 많은 아이다. 우선, 라야의 친모는 매춘부이며 누군가로부터 살해를 당했다. 라야는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이틀 동안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 이웃의 신고로 발견됐다. 엄마의 시체에는 이빨 자국이 가득했는데, 이는 당시 두 살이었던 라야가 엄마가 자는 줄 알고 깨우기 위해 했던 행동의 흔적이다. 또 라야는 여러 번 입양됐으나 그만큼 파양 당했다. 이런 라야는 '반응성 애착장애'로 아무에게나 강한 애착반응을 나타내거나 접촉을 거부하고, 성장이 지연되며, 체중이 늘지 않는 상태다.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탓'에 편도체가 없다시피 손상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병적 증상을 '다중인격장애 혹은 해리성인격장'로 키워 '라야'를 조종하는 '누군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존재는 대체로 '그림자'(감독의 의도된 연출에 따른)나 '라야의 그림'으로 표현되며, 실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실존에 대한 여부가 불확실하다.

이 지점, 다시 말해서 라야의 불행한 과거와 그 누군가의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점까지는 비프케와 관객 모두가 이해 가능하며, '라야의 폭력성'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에 머문다.

그러나 요새 말로 '라야가 선을 넘는 행동'을 보일 때부터, '비프케'와 '관객'은 동일한 지점에 머물지 않게 된다. 라야의 폭력성은 흔히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장난에서 시작하지만, 칼을 들고 언니인 니콜라야를 죽이려 하거나 비프케 친구의 아들을 성폭행하고, 동물들을 죽이고 시체를 방에 모아두는 등 '공포' 그 자체다.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한 아이의 끔찍한 폭력성이 과연 '비극적인 과거 만들어 낸 괴물'의 탓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런 고민도 잠시. '비프케'는 미아가 태어난 순간부터 친부모와 애착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약을 먹고 다 큰 아이에게 '모유'를 직접 먹이며, 종일 업고 집안일과 일을 병행한다. 이때가 진정으로 관객이 '언캐니하다' 느끼는 순간이다. 친숙하지만 지나치게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진 ⓒ FILM DIENST
사진 ⓒ FILM DIENST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작품은 오독의 가능성을 품는 지점들이 있다. 우선, 독일(서유럽)의 여성이 불가리야(동유럽)의 아이를 구원한다는 맥락의 해석이다. 이 해석의 근거 또한 작품 속 불가리야의 보육원이 '비프케'에게 '라야'가 여러 번 파양된 아이이며,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부로 숨겼다(범죄)는 점이 -아이가 잘 팔려야 하는 상품화된 시각- 더해지면서, 동유럽의 퇴보와 잔인함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독일어권의 문화'가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등에 흡수된 상황을 통해 '정치적 맥락'으로 읽힐 가능성을 제공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맥락은 엉킨 실타래가 기어코 풀릴 수 있는 한 가닥 정도!? 오히려 위험한 오독은 <펠리컨 블러드>가 현대의 '모성애 신화'를 쓰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캐니함'이다.

비프케가 다 큰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서 약을 복용할 만큼 '엄마'가 되고자 하는 행위가 '라야는 괴물이기에 파양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변인물들(어쩌면 관객도)의 생각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 대립은 '전자'(비프케)가 비정상적이고, '후자'(주변인물과 관객)가 정상적이라는 구조를 형성하면서, '전자의 언캐니함'을 더욱더 극적으로 보이도록 작용한다. 또 여기에는 '라야의 사정'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 행위의 결과(범죄에 근접한 지나친 폭력성)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프케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는 듯 '라야를 포옹하는 행위'는 이성적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는 탓도 크다.

 

사진 ⓒ FILM DIENST
사진 ⓒ FILM DIENST

다시 말해서, <펠리컨 블러드>가 '모성애 신화를 쓰고 있다'고 읽는 것은 '라야'를 이해할 수 없기에 '비프케'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도피적 선택'이다. 영화는 '이해하고 수용하는 기준'으로의 응시를 거부한다. 영화의 목적은 '관객의 설득'보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재설립하는 데 있고, 이러한 감독의 시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야기 속의 '인물의 행위나 선택'이 아닌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필자뿐만 아니라 '영화'도 강조한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두 가지 사건'을 연달아 터트린다.

시위를 막는 도중 승마자를 떨어뜨린 '탑건', 심지어 총상까지 입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탑건' 앞에 승마자는 갑자기 '조인 업'을 시도한다. 탑건과 충분한 시간도 노력도 심지어 상처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도된 조련은 성공할 리 없다. 오히려 승마자를 공격하려는 찰나 동료 경찰이 총을 쏘면서 탑건은 허무하게 죽는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는 '주술사'가 의식을 치러 '라야' 곁에 머무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떠나게 할 예정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라야를 치유할 수 없다고 깨달은 비프케의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한 번의 실패로 죽은 탑건의 머리를 제물로 바쳐 다시 한번 시도되는 주술. 다음 날 아침 '라야'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탑건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고, 엄마인 리프케와 언니인 니콜리나를 선뜻 안아주는 등 이제야 '엄마와 언니'를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연다.

 

사진 ⓒ FILM DIE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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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건의 실패와 성공은 단순한 대조가 아니다. 오히려 '비교'에 가깝다. 승마자는 리프케에게 배운 '조인 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충분한 시간과 노력 없이 자신과의 관계를 결속시키고자 강요를 한 셈이고, 리프케는 마법의 힘(주술이나 제사)을 빌려서까지 '라야'와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셈이다. 특히, 리프케의 모습은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 속 외지인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애쓴 '종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제목인 <펠리컨 블러드>는 서양의 고대 전설에서 펠리컨은 아픈 새끼에게 자신의 부리로 심장을 찔러 피를 나눠주면 살아난다는 전설을 의미한다. 펠리컨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는 마치 리프케의 가슴에서 나오는 모유를 의미한다. 다만, 펠리컨은 자신이 낳은 새끼이며, 리프케는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이라는 차이를 가진다. 이 차이는 맹목적인 모성애를 더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태초부터) '모성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프랑스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의 주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사진 ⓒ FILM DIE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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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나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본능(모성애)을 거스르는 사람'일까. 또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여성'은 '모성애'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바댕테르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모성>(동녘)에서 "모성애는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이라며 모성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다. 이어 "모성애란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우발적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의 결론에 비추어 '비프케'를 보자면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기에 '라야'에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프케가 탑건에게 조인 업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시켰던 것처럼 '비프케'는 오히려 '라야'가 이전의 자신을 버렸던 부모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도록, 자신에게 부모로의(보호자로의)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린 것이다. 이건 '진짜 엄마'(모성애가 아닌)가 되기 위한 투쟁이다.

<펠리컨 블러드>는 '공포'라는 증후로 관객에게 노크한다. 이 징후는 '성악설, 악마',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 어쩌면 '육아에 대한 공포'일 수 있다. 영화는 결혼을 거부한 채 홀로 사는 여성을 통해서 다층적으로 공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또 관객을 시험하는 건지, 극 속 엄마인 '비프케'를 시험하는 건지 혼란케하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뀌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리듬감 있게 전개하는 감독의 연출이 서사의 극적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영화는 '공포 영화'라는 장르적 장치를 이용해 '모성애'의 본질을 파고들며, '완벽한 어머니상'을 깨부수는 기발한 작품이다.

 

사진 ⓒ FILM DIE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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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System Crasher'는 독일에서도 흔하게 쓰이는 말은 아니다. 보호소나 보육원 같은 곳에서 쓰이는 말로,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아이를 일컬어서 보호 분야에서는 'System Crasher'라고 부른다. (...) <도주하는 아이 System Crasher>를 통해 관객들이 아무리 어린아이가 폭력적이고 설령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아이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의 세계, 즉 자신이 사는 삶의 세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느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전학을 보내거나 퇴학을 시키는 등 '쫓아내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스템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가 '난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베니'와 같이 거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가 넘치고 과잉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실제로 들여다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가지고 있다.

- 노라 핑샤이트 감독, 2019 전주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19.05.08) 중에서 -

 

노라 핑샤이트 감독의 말처럼 <펠리컨 블러드> 속 '비프케'는 '도와달라고 보내는 아이의 신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알아들었던 인물이다. 또 아이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아껴줬던 '그녀의 사랑'까지. 영화의 결말, 주술로 '라야'를 구하는 과정엔 '비프케가 라야를 출산하는 행위'가 묘사된다. 이 이미지는 엽기적이거나 언캐니하지 않다. 이 이미지는 고통스러운면서 뜨겁다. 혈연이 아닌 아이를 진정으로 내 아이로 받아들인다는 것. 어쩌면 우린 아이라는 존재를 싫으면 버릴 수 있고, 문득 생각나면 키워볼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한다. 어쩌면 영화는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망각'했던 '아이라는 존재', '가족의 의미'를 되찾고자 했을지 모른다. 해체가 아닌 화합으로.

 

사진 ⓒ FILM DIE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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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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