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의 영화 명장면] 7월 - <프리즌 이스케이프> <더 플랫폼> <레드>
[씨네필의 영화 명장면] 7월 - <프리즌 이스케이프> <더 플랫폼> <레드>
  • 코아르CoAR 편집부
  • 승인 2020.07.2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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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의 명장면]은 '코아르CoAR'의 필진들이 매달 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뽑은 명장면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이 글에는 줄거리, 해석, 비평보다는 '왜 그 장면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선명한지' 필자 스스로 되물으며, 감독의 카메라를 언어로 기록합니다.

<더 플랫폼 The Platform> 가더 가츠테루-우루샤 Galder Gaztelu-Urrutia | 2019

사진 ⓒ IMDb
사진 ⓒ IMDb

<더 플랫폼>에서 가장 핵심으로 보여주는 것은 역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사까지 동원하여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공략한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개를 데리고 온 '룸메이트(?)'는 아래층 사람들에게 말한다. 필요한 만큼 먹었다면 다음 층으로 음식을 내려줘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공허하다. 아래층 사람들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다. 다만 협박만이 통한다. "이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음식에 똥을 칠해 주겠어"

그제서 아래층 사람들은 반응한다. 다음 장면으로 이들은 음식이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층으로 내려가게 된다. 여자는 자살한다. 사람과 함께 나누자는 것조차 자신이 분배 가능한 위치에 있을 때 기능한다. 그렇지 않다면 절망, 혹은 죽음뿐이다.

이 자살은 그래서 의문스럽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변화를 말하지만, '이상'만을 말하는 이들에 대한 조롱인가, 아니면 자신도 결말에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절망'인가. 정답은 감독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불안한 것은 왜일까. 나는 감독이 전자와 후자 모두를 고를 것만 같다.

엔딩에서 굳이 굳이 넣은 소녀가 0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불안이다. 그다음 장면은 상상조차 하지 말라는 듯, 영화는 끝나버린다. 사실 영화를 본 한참 뒤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감독은 다른 엔딩을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 전반에 담긴 내용 전체를 바꾸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다. 이미 너무 많은 절망을 깔아두었다.

[코아르CoAR 배명현 영화전문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프리즌 이스케이프 Escape From Pretoria> 프란시스 아난 Francis Annan | 2020

사진 ⓒ IMDb
사진 ⓒ IMDb

<프리즌 이스케이프>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던 시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권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주인공들이 탈옥을 시도하는 이야기이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시위를 하다가 투옥된 주인공들이 백인이라는 점,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 등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깊게 다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가 탈출영화로서 관객들에게 주는 스릴은 확실하다. 영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긴박감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 많은데, 그중 가장 큰 재미를 가진 장면은 '교도소의 마지막 문'을 여는 장면이다.

아슬아슬한 위기들을 극복한 세 명의 주인공들은 탈출을 위한 마지막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을 열기 위해 미리 준비한 열쇠가 맞지 않는다. 다른 열쇠들로 시도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여태까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방으로 복귀하면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있다. 이대로 문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 교도관에게 발각되어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선택해야 한다.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주인공들 중 한 명이 문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굉음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근처에 교도관이 있다면 분명히 들을 것이고, 근처가 아니더라도 아주 멀리까지 전달될 만한 소리다. 동료의 돌발 행동에 당황했던 다른 두 인물들도 함께 문을 부수기 시작한다.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문을 부수기 시작한 인물은 이들 중 자유를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이였다.

[코아르CoAR 선민혁 에디터, sunpool2@ccoart.com]


 

<레드 Red> 마시마 유키코 Yukiko Mishima 三島有紀子 | 2020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레드>의 결말은 제목 그대로 '붉게' 물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 카호 앞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피)만이 존재한다. 슬픔에 빠지는 것도 잠시, "엄마!"라 부르는 울음 섞인 '딸'(혈연)의 외침이 들린다. 그렇다. 약 두 시간을 넘어선 영화는 이제서야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이 순간 '토고'(카호)는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쿠라타'(츠마부키 사토시)는 죽었다. 지금이라도 남편과 아이를 선택하면, 고급스러운 이층집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온전히 '자식을 위해서'라는 마음(희생)이 더 클 수 있다. 딸은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엄마를 찾는다. 영화는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지독하게 잔인하다.

'토고'는 이제 더는 상류층 집안의 며느리도, 안락한 집도 원하지 않는다. 또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더는 함께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딸'은 분명 다르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자식이고, 세상에서 가장 이쁜 존재다. 그러나 그녀는 딸에게 가지 않는다. 울부짖는 딸을 뒤로 한 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가장 커지는 순간이다.

이 결말은 마치 관객의 예상을 뒤흔들 스릴러 장르와 같은 '게임'이 아니다. 또 '딸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든 영화에 필요한 '도구나 장치'도 아니다. 더욱이 이 결말이 '비극적이다' 부를 이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토고의 선택은 피가 철철 나는 위태로운 수술 끝에 뿌리까지 뽑아낸 '거대한 악성종양'을 제거함에 있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가 내뱉어야 하는 것은 '탄식'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다. 카메라 밖으로 나올 듯, 쿠라타의 장례식장 아래로 걸어 내려오는 '토고'의 길은 이제 오로지 '자신에게 향하는 길'(자신으로의 회귀)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다. 쓰러진 쿠라타를 대신해 운전을 하는 토고.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눈이 쌓인 도로 위를 달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자리한다. 이 순간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을지 모른다.

'마시마 유키코' 감독의 미학은 '한 여성의 해방'을 오로지 '인물의 움직임을 통한 운동성'으로 끌어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레드>는 관객의 응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관객의 응시를 필연적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뛰어난 성취가 있는 작품임을 기어코 수긍하게 된다.

[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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