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BIFAN] <바보 타로> 소외된 자의 총구
[24th BIFAN] <바보 타로> 소외된 자의 총구
  • 오세준
  • 승인 2020.07.14 2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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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보 타로'(Taro the Fool, Japan, 2019, 119분)
감독 '오모리 타츠시'(OMORI Tatsushi)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영화 <바보 타로>는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 초이스: 장편' 섹션에 초청된 작품으로, 오모리 타츠시(OMORI Tatsushi) 감독이 연출했다.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신작 <바보 타로>의 한 줄 평은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만만치 않은 수작(秀作)의 등장. 

영화는 호적도 없고 학교도 간 적 없이 홀어머니에게서 방치된 채 황량한 공터에서 종일 지내는 '타로', 고등학생 '에이지'와 '스기오'의 일탈을 그린다. 방황하는 아웃사이더들을 꾸준히 그려온 오모리 타츠시 감독은 데뷔작 <게르마늄의 밤>(2005)을 찍기 이전에 이미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특히, 영화는 사가미하라 장애인시설 집단살상사건(2016), 육아 포기와 약자 방치 등 일본 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담겨있다.

우선 <바보 타로>는 쉽게 읽히지 않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내러티브와는 별개로, 작품의 기질에는 예술적 의미로의 '시네마'라는 영화의 미학뿐만 아니라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현대 일본사회의 병적 징후들은 사회학적 해석으로 관객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즉, 영화의 표현이 단순히 사회적 문제를 스크린 밖으로 꺼내놓는 식이 아닌, 미장센, 몽타주, 사운드, 인물들의 움직임 등의 작품을 구성하는 영화적 요소들이 뚜렷한 합(合)을 이루면서, 각 요소들이 서로 상쇄해 존재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 되려 더욱더 명확해지는 조합을 이룬다. 단 이런 필자의 생각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작품이 반드시 기호학적 해석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른 없는 사회

'에이지'(Suda Masaki), '스기오'(Nakano Taiga), '타로'(Yoshi) 이 세 친구들은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부수고, 피자가 먹고 싶어서 피자가 든 배달 오토바이를 통째로 훔치며, 또 지나가는 행인을 겁박해 돈을 빼앗는다. 누가 시키지도, 그렇다고 막상 돈이 필요하지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눈치다. 그러던 중 그들은 야쿠자인 '요시오카'의 돈을 빼앗으려던 중 우연히 그의 '총'을 넣게 된다.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긴장과 공포. 이렇듯 폭력이 일상이 된 그들의 일탈은 '단순한 놀이'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바보 타로>는 관객인 우리가 세 명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영화 속 '에이지, 스기오, 타로'의 극악한 비행을 보고 있자면, <시계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 1971) 속 '알렉스, 피트, 조지 그리고 딤'의 모습과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2011)의 '케빈'이 떠오른다. 이들의 공통점은 폭력적이면서 악마적 캐릭터인 동시에 금기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가진다. 알렉스에게는 '신부'(루비드코 갱생 프로그램)가 있었고, 케빈에게는 엄마인 '에바'(육아와 훈육)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반면 <바보 타로> 속에는 부모도, 교사도 심지어 경찰도, 누구도 그들 곁에 위치하지 않는다. 또 <위!>(르네 엘러, 2018) 속 10대인 '토마스, 리즐, 에나, 시몬'의 폭행과 섹스로 얼룩진 범죄에 상응하는 '법의 심판'과도 거리가 멀다.

즉, <바보 타로>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보여준 '악'(잔혹함)에 대면과는 결이 다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이들은 학교로부터, 집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려지고 철저히 외면당한 존재다. 이들이 언제나 버려진 공터,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아래, 버려진 집 등에서 다소 제한된 공간을 가지는 이유도, 그들의 밤은 어둠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 들어가야 하는 모습도, 결국 이들은 사회라는 울타리 너머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들의 배회는 마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후 보, 2018) 속 도시 속을 떠도는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 즉 '억압'이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왜 빠져나갈 수 없는지 모르는, 또 자신이 갇혀있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인 셈이다.

에이지와 타로를 잠시 뒤로 한 채, '스기오'의 상황만을 생각해본다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구조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스기오가 좋아하는 같은 학교 여학생 '요코'(Ueda Sasha)는 돈을 받고 남성에게 몸을 판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점점 커지는 그녀에 대한 사랑 앞에 무기력해져만 간다. 그녀를 향한 고백도 잠시, 계속해서 그녀가 낯선 남자랑 모텔을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스기오는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는 그녀가 왜 몸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정은 궁금치 않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기에 그녀가 몸을 팔아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낯선 남자에게 허락하는 그녀의 몸이 왜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지 분노한 채 그녀를 겁탈하려 한다. 심지어는 그녀에게 3만 엔을 주며 섹스를 요구한다.

스기오는 요코와 이뤄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녀의 세계(존재적 삶)에 거부당한다. 에이리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스기오는 요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소유하려 했기에 실패한 것이다. 여기에서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관계라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인다. 에이지와 타로의 경우도 스기오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진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에이지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더는 유도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꾸준히 체육관을 찾는다. 그러나 도복을 갖춰 입고 열심히 연습을 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그는 외부인일 뿐이다. 타로는 어떨까. '타로'는 이름없는 사람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는 이름도 없고, 학교를 다닌 적이 한번도 없다. 그에게 엄마가 있지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부모가 과연 부모라 말할 수 있을지. 에이지가 학교교육(공교육)으로부터 떨어진 존재라면, 타로는 국가라는 사회제도 밖에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구분에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오로지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의 몸짓일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감독 꽤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가 있다. 타로의 장애인 친구 한 명(남성)이 물에 빠져 있으며, 또 다른 장애인 친구(여성)는 지켜만 보고 있다. 아니.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흠뻑 젖은 채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울리는 상황(외부 사운드)에서 숏은 오토바이를 타고 터널 밖을 지나다 넘어지는 에이지와 요코를 겁탈하려다 실패하는 스기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래를 향해 나아갈 거야"라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화면을 울린다. 허망하고 허무한 이미지들의 연속,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현재'만을 유지하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좌절과 실패를 불러온다.

더욱이 여기서 등장하는 두 명의 장애인은 타로의 친구이면서, 서로 좋아하는 관계다. 영화는 그 장애인이 왜 죽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왜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타인의 존재는 철저히 그들을 외면하는지. 영화 안에 세계는 일상적인 활동이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의 존재를 지독하게 배제하고 유린한다. 또 그것이 사회라는 테두리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주인공들 역시 이와 무방하지 않다는 것. 스기오가 아무리 요코에게 다가가도, 에이지가 아무리 체육관 안으로 뛰쳐 들어가도, 그들 역시 철저히 따돌려질 뿐.

'타로'의 존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방치된 아동의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듯 보이지만, 절대 그러하지 않다. 타로는 "너 몇 살이니?" "어디 학교 다니니?"와 같은 질문을 회피하면서, "좋아하는 것은 어떤 감정인지"와 같은 알 수 없는 질문들(어쩌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공교육의 결핍)에 해답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친구가 죽었지만, 왜 죽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쳐도 결코 알 수 없다. 타로의 존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5), <어느 가족>(2018) 속 버려진 아이들의 미래이다.

 

사진 ⓒ 부천국제영화제
사진 ⓒ 부천국제영화제

다시, 이처럼 <바보 타로>를 지탱하는 것은 소외된 자들의 몸짓이지만, 관객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총구의 궤적'이다.

'요시오카'는 에이지로부터 '총'을 회수하려 한다. 그러나 에이지는 쉽게 총을 내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총은 타로가 가지고 다니며, 어떤 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는 요시오카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다리 아래로 떨어져 물에 빠지는 위험을 겪으면서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일까. 이들에게 '총'은 단순한 장난감이면서, 강력한 생존수단이다. 오해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생존수단'은 이들이 타인에게 더 나아가 세상에 위협을 가해서라도 자신들의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이지가 장난으로 총구를 스기오와 타로에게 향하는 순간이나, 타로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또 자신의 엄마에게 총구를 향하는 순간 기어코 마지막에 이르러 스기오가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주인공들의 일탈만큼이나 총구의 방향 역시 위태롭기 그지없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8톤 트럭 두 대가 서로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오프닝 시퀀스'에 대해서

요시오카: 목숨이 가장 가치 있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

오다: '버블경제'인가요?

요시오카: 돈이 있으면 갑자기 목숨이 가치 있게 느껴지거든. 바보들이지. 전쟁 때나 지금이나 같아 목숨엔 가치가 없어.

또다시, 잠시 <바보 타로>의 오프닝 시퀀스에 대해 복기를 해보자.

야쿠자 '요시오카'(Okuno Eita)는 노인 '오다'(Kunimura Jun)를 차에 태우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한다. 한 번, 두 번 문을 열고,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가 도착한 곳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묶여 있다. 소란을 피운 흔적을 발견한 요시오카는 에이지를 때리기 시작한다. 분이 안 풀린 요시오카는 소란을 피운 장애인을 향해 총을 쏜다. 이어 말한다. "3천 만엔에 팔려 이곳에 있으면서 어쩔지 아무도 말 안 하니 내가 해주지. 죽으면 되는 거야"라고. 그런데 이 말은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의 범인 '우에마쓰 사토시'가 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중증, 복합증세의 장애인들은 안락사시켜야 한다"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은 막대한 돈과 시간의 낭비로 이어진다"라는 말과 이어진다.

요시오카와 요다는 시체를 이끌고 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묻는다. 오다는 끊임없이 말한다. "당신은 잘못하고 있어요"라고. 이런 그의 말에 요시오카는 모순적이라고 말하며 화를 낼 뿐이다. 그리고 요시오카는 두 번째 총의 당아쇠를 당기고, 요다의 시체도 함께 묻는다. 이 시퀀스는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의 재현과 다름없다. 여기서 요시오카는 그만의 논리로 채워진 발언을 뱉곤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 이 시대는 살 가치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에게 향하며, 오다와 같은 어른(기성세대)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가 보여주는 건, 살인 사건의 순간이 아니라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끝난 후 다가올 참혹한 미래인 듯 다가온다. 중요한 건 이 시퀀스에는 요시오카의 말이 사실인 듯 그려지는 점과 어느 누구도 서로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요시오카와 오다, 두 사람과 장애인, 고립된 장애인들까지. 여기서 어떤 이유로 에이지가 함께 갇혀 있나 보다는 '에이지, 스기오, 타로'의 이야기가 오프닝 시퀀스와 어떤 기질을 공유하고 있냐에 더 고민해봐야 지점을 가진다. '따돌림, 즉 사회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현실'이라는 지독한 아픔을 영화는 시작부터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사진 ⓒ 토론토국제영화제

영화에 결말에 이르러 스기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에이지는 강가에 와 기절하는 듯 쓰러진다. 타로는 일어나라며 소리치지만, 들을 리 만무하다. 타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놀고 있는 공터를 향해 뛰어가고, 아이들 틈에서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운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이 결말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션 베이커, 2018)의 결말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떠나는 무니의 손을 잡고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젠시. 그러나 영화의 화면은 검게 막을 내리면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리만을 들려준다. 두 아이는 과연 디즈니랜드 안으로 들어갔을까.

타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니와 젠시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세계는 닫혀있다. 어쩌면 열려 있는 문 앞에서 수십 년 서성였던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법 안에서>의 주인공은 양반인 셈이다.

<바보 타로>는 폭력의 당위성이나 윤리적 고찰과 같은 '잔혹함'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사회적 약자)을 통한 일본 사회의 잔혹함을 재현한다. 일본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 이 같은 어른이 늘어나는 시대에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일본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제도의 결함이나 통치자의 부주의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그런 사회집단'을 만들어 내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산물이다"라며, "현대인은 잊고 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이 '상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데까지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라는 그의 말 역시 그의 주장을 채워준다.

 

사진 ⓒ 부천국제영화제
사진 ⓒ 부천국제영화제

영화 속 동적인 이미지들은 수많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는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자유'가 들어있다. 그들의 비행을 보며 혀를 차지 않았는지, 선입견으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관객인 내게도 환대하지 않은 책임을 묻고 있는 듯하다. 오모리 타츠시 감독은 핸드헬드(handheld]) 기법으로 인물들을 날 것 그대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리얼리티를 높인다. 여기에는 그만의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담겨 있다. <바보 타로>는 숏과 숏의 치밀한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인물들의 동선과 카메라의 기법까지 무엇하나 아깝지 않을 만큼의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내러티브나 사회적 고찰보다는 '시네마'로의 의미를 찾고 싶을 만큼 강렬한 작품이다.

 

P.S.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다양한 작품들은 <바보 타로>를 조금 더 쉽게 읽기 위한 예시에 불과하다. 혹시나 <바보 타로>가 여러 영화들의 레퍼런스를 참조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렇게 글을 남긴다. 오히려 이 작품의 오리널리티를 조금 더 텍스트로 끌어오지 못한 필자의 역량이 아쉬울 뿐. 더욱이 짧은 영화제 기간 동안 길게 감상할 수 없는 한계 역시 아쉬울 뿐이다. 

 

한국에서 그닥 유명하지 않지만, 타로역을 맡은 요시(YOSHI)는 중학생때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를 만나 루이비통, 오프 화이트 등에서 활동한 모델로, 일본에서는 인기가 상당하다. 그의 독보적인 스타일과 무관하게, 이 영화에서는 '늑대아이'의 모습처럼 야생적이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많은 작품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한편으로, 오모리 타츠시 감독은 <일일시호일>(2018)로 그해 일본의 권위있는 영화상인 호치영화상(報知映画賞))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을 넘어서는 득표를 받은 바 있다. 이는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악화된 한일관계와 팬데믹의 위협 속에서 이렇게 부천에서 그의 신작을 볼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느꼈다.

사진 ⓒ MYDRAM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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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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