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부산행' 신파라고 부르기엔 아까운…
[연상호] '부산행' 신파라고 부르기엔 아까운…
  • 배명현
  • 승인 2020.07.1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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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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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시작부터 과격한 주장을 하고 싶다. "연상호는 처음부터 좀비영화를 만들었다"고. <돼지의 왕>(2011)을 만들었을 때부터 그는 좀비를 그리고 있었고, <서울역>(2016) 이전의 <사이비>(2013)를 그리고 있었을 때도 그는 좀비를 그리고 있었다.

부산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그의 이전 영화들을 회고해보자. <돼지의 왕>은 학교 내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돈과 힘을 가진 학생과 그러지 못한 학생들 사이에는 벽이 있다. 이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굴복해야 하고 핍박받아야 한다. 이 구분법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영화에서 그 모습을 숨긴 존재들. 어떤 구분에도 들어가지 않는 소위 평범한 애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폭력에도 속할 권한이 없다. 능력의 부족으로 상위계급으로 갈 수도 없다. 그들의 폭력을 막을 능력도 없다. 거꾸로 폭력을 당하는 것 또한 그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다. 어떤 서사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배제되어있다.

이와 같은 맥락을 이어 <사이비>가 있다. 하지만 사이비는 한 차례 더욱 발전된 형태로 좀비물에 가까워져 있다. 영화 안 마을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좀비를 은유한다. 마을 안에 종교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그리고 마을은 삽시간에 사이비 신자들이 된다. 이 마을 안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자는 주인공 단 한 명뿐이다. 사이비라는 바이러스를 거부하고 붕괴시키려 한다. 좀비의 입장에서 반 좀비는 악이다. 동시에 좀비가 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더욱 좀비물로서 은유가 가능한 이유는 사이비가 군상극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이비>에서 가장 임펙트 있는 순간은 어디인가. 교주의 사기에 마을 사람들이 홀리는 시퀀스 아닌가. 좀비 영화의 클리셰를 복기해보자. 밀폐된 공간에서 좀비가 등장한다. 그리고 좀비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좀비로 변한다.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좀비로 가득한 화면을 카메라는 비춘다.

연상호는 이 두 준비과정 이후 <서울역>과 <부산행>을 감독하였다. 그는 좀비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본인의 세계관을 새롭게 세웠다. 이전까지 '대안 없이 염세적이기만 한 시선'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서울역>에선 모든 인간을 좀비로 만들어버리고 현실 정치를 겨냥하지만 분명 인간의 존엄과 연대를 지키려는 장면들이 있었다. 특히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까지 저항을 하려는 모습과 주인공 '혜선'을 구하려 한 남자의 모습도 비춘다. 클리셰 혹은 장치라고 말하기엔 그 이전의 연상호 작품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진ⓒ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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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카메라로 담은 <부산행>은 어떠한가. 부산행이야 말로 인간의 연대 그리고 인간 사이의 정치적 불능 상태를 담는다. 그리고 그 결말엔 한국적 엔딩(?)으로 인간에 대한 모종의 믿음을 담는다. 하지만 이 지점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왜 잘 나가다가 신파로 결말을 맺냐는 것이다. 나도 당시 영화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새하얀 배경에 주인공 석우(이 순간은  뭔가 석우라기 보단 '공유'의 광고 한 장면으로 보인다)가 수안의 아기시절을 바라보는 플래시백으로 비춰진다. 작위적인 공간이 플래시백으로 작동하기엔 적당하지만 너무나 돌출된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지점이 있었다. 이것이 해외의 좀비영화 팬들에겐 신선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익숙했던 한국식 신파는 그들에겐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렇다. 좀비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다. 해외 좀비 영화의 클리셰는 대게 한국과는 다른 가족애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가족 중 누군가 좀비가 되어버리는 상태. 좀비가 되어가는 가족을 죽여야 하는 순간의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는 중간 과정이지 결말이 아니다. 해외 좀비영화의 결말은 생존 그 자체이다.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부산행>은 희생이다. 영화 시작부터 부성애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달린 <부산행>에서 희생이라는 장치는 아주 적절하게 작동한다. 또한, 기차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생존 게임을 풀어내는 방법 또한 창의적이다. 소리와 어둠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풀어내는 방식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기차라는 조건과 엮어 매우 자연스러운 설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설정과 클리셰를 비꼬는 것은 장르영화가 발전하는 데 있어 발판이 된다.

<부산행> 안에 있는 각자의 캐릭터 또한 적절하게 조응하고 작동한다. 직업 소명정신을 지키는 기장, 좀비 영화에서 꼭 등장하는 정치적 인물인 영석, 우정과 애정의 역할을 보여주는 영국과 진희, 강력한 조력자인 상화, 다음 영화 혹은 인간 세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예견하는 성경이 그러하다. 이들은 어긋나지 않고 장르라는 규칙 안에서 적확하게 움직인다.

 

사진ⓒ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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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좀비라는 장르를 꽤나 훌륭하게 만든 것이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베이비 드라이버>(2017)로 유명하며, 코믹 좀비 영화인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만든 에드가 라이트(Edgar Wright) 감독 조차 <부산행>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트윗을 잠시 빌려 본다.

 

Best zombie movie I've seen in forever. A total crowd pleaser. Highly recommend. Go see 'Train To Busan'.

역시 연상호는 좀비를 찍을 때 혹은 좀비를 그릴 때 가장 연상호스럽나 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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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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