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세계 - <돼지의 왕> 개와 돼지라는 계급
연상호 감독의 세계 - <돼지의 왕> 개와 돼지라는 계급
  • 배명현
  • 승인 2020.06.21 2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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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돼지의 왕'(The King of Pigs, 한국, 2011, 96분)
감독 '연상호 '

 

"대중적인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회적 메시지를 띈 작품이 결국 대중적인 게 아닌가 싶어요. 어차피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사는 거잖아요."

- 맥스 무비 인터뷰, <돼지의 왕> 약자의 절망감 느낄 수 있다, 감독 연상호

나도 동감한다. 대중적이다는 것이 단순히 순간의 흥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회적이지 않은 작품은 아무리 미학적으로 훌륭하다 해도 영화가 끝난 후 남는 것이 없다. 공허하다. 그런 영화는 인기를 끌 수는 있다 하더라도, 금세 잊혀진다. 오랫동안 살아남는 작품은 결국 그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현재의 나는 믿고 있다.

<돼지의 왕>은 살아남았다. 개봉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만들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고 현재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겨져있다. 영화 개봉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  '무비 맥스'와 인터뷰는 그래서 인상깊다. 지금은 10개 이상의 필모를 가진 그가 말한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은 멘트는 이것이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사진 ⓒ KT&G 상상마당

"계급사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계급사회 하부구조에 대해서요. 그 동안 상위층의 비리와 속성을 말한 작품은 많았잖아요. 하부구조를 다룬 작품도 없었던 건 아닌데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훑는 데에 그친 게 많았죠. 저는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문화 '산업'이기 때문에 대중이 보고싶어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 보고싶지 않은 것을 선택한 다는 것은 분명 불리하다. 하지만 연상호는 그 불리함을 품고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현실'이란 보고싶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계급제로 나뉘어진 교실, 폭력, 학대, 가정 불화, 죽음, 실패 등등등. 이 영화는 인물들에게 일말의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결말 또한 흔히 말하는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를 러닝타임 내내 종료 버튼을 누르고싶은 욕망이 들끌어오른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사진 ⓒ KT&G 상상마당

하지만 연상호는 명확하게 이 지점을 파고든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폭력들을 광기에 가깝게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대해 폭력을 전시한다 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거기에 반만 동의한다. 분명 '쎄게' 가려는 의도와 포부는 명징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필요악 처럼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영화와 윤리, 혹은 필요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이 지면은 연상호의 <돼지의 왕>을 2020시점으로 다루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 말해 폭력을 전시한다는 의견에 '반'이나 동의하는 것이다. 돼지의 왕은 2008년에 개봉안 영화이다. 그리고 08년이었기에 개봉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반에 개와 돼지라는 계급으로 나뉘어있는 중학생 1학년의 반, 영화 속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는 두 인물로 진행된다. 그 속에서 여성 인물은 분명 소모적이다. 이름 없는 룸살롱 인물, 김철의 어머니, 목졸려 죽은 경민의 아내(영화는 설명 하진 않지만 맥락 상으로 경민이 자살하기 전 목졸라 죽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종석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걱정하는 명미. 이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라고 해서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인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화면에 몇번 비추지 않으면서 소모되어 버리는 캐릭터는 모두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사진 ⓒ KT&G 상상마당

이때 다시 영화의 사회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 08년도에 나온 이 영화는 왜 모든 여성이 절망의 화면 속에서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는지. 2020의 시점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돼지의 왕>을 단적인 시선으로만 보아선 안된다. 하지만 내가 예전에 보았던 눈과 현재의 눈에서 가장 다르게 느낀 지점은 폭력과 여성을 다루는 지점이었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말해버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사회를 명징하게 은유하는 공간인 학교, 영화 속 동네에서도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을 만큼 큰 의미가 없다. 심지어 종석의 화풀이 대상인 명미는 온갖 폭력을 당하면서도 종석을 걱정한다. 왜 그녀는 그렇게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도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까지 진행된다. 가장 큰 의문은 종석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명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 때 종석은 계속 해서 전화를 받지 않고, 핸드폰을 끄지도 않는다. 왜인가. 자신을 찾는 전화가 끝어지는 순간 자신의 사회적 연결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찾아야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그 무엇하나 해낼 수 없는 -능동적으로 세계를 향해갈 의지-상태로 사회성을 거세당한 종석에게 명미는 성녀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종석의 대사 한 줄로 끝난다. 지금 어디냐는 명미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사진 ⓒ KT&G 상상마당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다시 한번 배제 당한, 이름조차 말하지 못한 인물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영화의 움직임 안에서 은폐 당한 채 희생의 역할로서 모습을 감춘 이들은 영화가 끝난 후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나는 감독의 인터뷰를 다시 한번 복기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띈 작품이 결국 대중적인 게 아닌가 싶어요. 어차피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사는 거잖아요” 이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은 여성의 모습도 '이제는' 드러나야 좋은 영화가 아닐까.

분명 영화는 명징한 계급 사회에서 입체적이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더 훌륭했던 작품을 왜 지금은 다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동시에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은 지점'을 보여준 것이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사진 ⓒ KT&G 상상마당

[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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