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미시마 유키코'(MISHIMA Yukiko)
영화 <레드>(2020)는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 천국' 섹션 초청착으로, 미시마 유키코(MISHIMA Yukiko) 감독이 연출했다.
일본영화 <레드>는 <해피 해피 브레드>(2012),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2015), <친애하는 우리 아이>(2017),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2018)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미시마 유키코'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 신작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일본 문단의 아이돌로 불리며, <리틀 바이 리틀>(2004), <퍼스트 러드>(2019)로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마모토 리오'(Shimamoto Rio)의 동명소설 <레드>를 영화로 만들었다. 특히, 배우들의 라인업이 상당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의 '카호', <자객 섭은낭>(2015),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의 '츠마부키 사토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의 '에모토 타스쿠'가 출연했다. 이들은 현재 일본 대세 배우들로써 작품 속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뜨거운 연기 시너지를 발산한다.
영화는 주인공 '토고'(카호)의 일상을 담는다. 그녀는 상류층 집안의 남편과 결혼했으며, 6살 딸과 함께 멋들어진 벽돌집에서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삶은 항상 바쁜 마마보이 남편, 심지어 남편의 부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불행한 전업주부다. 심지어 섹스마저 자신의 욕구만을 해소하기 바쁜 남편 탓에 최악의 밤을 보내기 일쑤다. 그런 그녀 앞에 과거 좋아했던 건축가 '쿠라타'(츠마부키 사토시)가 등장한다. 10년 만에 마주한 두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꺼내며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전공한 건축 일을 다시 시작한 '토고'는 집, 가족, 남편 그리고 딸까지 잊어버릴 만큼 일에 재미를 느낀다. 하지만 쿠라타와의 관계는 좀처럼 진전되지 못한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답습하려는 듯 위태로워 보인다.
'토고'와 '쿠라타'의 불안정한 관계는 마치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2016)에 등장하는 '상민(전도연)과 '기홍'(공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레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전개 방식'과 '클로즈업'을 통해서 깊숙이 파고드는, 그 대상이 '토고'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펼쳐낸다. 영화의 시작은 앞서 언급한 토고의 집이 아닌, 눈이 쏟아져 내려오는 어느 도로 위다. 이곳에는 토고와 쿠라타뿐이다.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한 채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그리고 화면은 밝은 날 흰색 원피스를 입고 딸의 유치원으로 향하는 토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도로 위를 달리는 '현재'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인 '과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과거의 장면을 단서 삼아 '현재'의 토고와 쿠라타의 관계를 추론하는 과정으로, 마치 '현재'하는 시간의 존재를 위한 '과거'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결국, 영화의 현재진행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인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 전개다. 이 부분에는 '꽤나 노골적인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이 영화가 기어코 치정극으로 치닫느냐'에 대한 관객의 몰입과 집중을 지속적으로 흩트리고자 하는, 즉 멜로‧로맨스의 장르적 문법을 따르지 않기 위한 나름의 시도처럼 다가온다. 여자 주인공 '토고'의 위치는 당연하게도 쿠라타의 등장과 동시에 집에서 '회사'(남자 주인공의 공간)로 이동된다. 관객인 우리가 감독의 카메라를 따라가는 목적에는, 이제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이어지느냐에 둔다.
하지만 감독의 카메라는 우리가 가지는 목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다른 설정값'을 카메라를 통해 도출하도록 숏을 연결한다. 그리고 직장 상사인 '코다카'(에모토 타스쿠)의 존재가 감독의 목적을 안내할 강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코다카는 솔직하게 토고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려 든다.(물론, 이것이 장난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쿠라타에게 토고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둘이 한잔했어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한편으로, 코다카와 토코가 즐겁게 노는 장면은 현재라는 시간의 진행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님에도 5분 정도로 꽤 길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에 이르러 두 사람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조력자로 활약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코다카'의 존재가 신선한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기억을 전개하는 감독의 의도가 전형성을 띠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시도의 의미는 <레드>가 보여주고자 하는 두 사람의 관계, 이것을 정의하는 결론에 이르러 더욱더 뚜렷해진다.
확고하게 정해진 '두 사람의 사랑'은 결말에 이르면 예상치 못한 장면으로 당황하게 만든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토고의 궤적'은 단순히 한 남자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원받고,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되찾을 뻔함을 벗어난다. 토고의 딸의 사고로 남편과의 갈등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영화는 추락한 '아내'의 위치 더 나아가 가족 안에서 '여자'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부부 관계에서, 또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의 '토고'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그릇된 욕망(남편의 욕망)을 위해서 바람난 아버지의 존재를 미화하는 토고에게 그녀의 엄마는 "한심하구나. 거짓말하면서 행복하니?"라고 말한다. 토고는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위해서 사랑을 해야 했고, 자식을 가져야 했으며, 이상적인 가족 안에서의 여자가 '옳다'고 생각했던 인물인 것이다.
쿠라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그녀는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결혼은 뭐야?" 그는 말한다.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상적인 답의 실현은 '토고' 몫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참고 노력하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 왜 그랬을까?”라는 그녀의 말처럼.
영화는 토코와 쿠라타의 농밀한 정사를 두 번 보여준다. 감독의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몸짓이 아닌 표정만을 담는다. 쿠라타는 말한다. '너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그렇게 뒤섞인 그들의 색이 붉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분명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사소한 감정까지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공들이는 감독의 클로즈업 덕분이다.
쿠라타는 죽는다. 그는 이미 그녀를 만나는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의 화장터에서 토코를 찾는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순간 영화는 중요한 위치에 선다. 다시 가족 안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에블린>의 결말 속 떠나는 프랭크의 손을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에블린의 모습처럼. '토고'는 딸의 울음 섞인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 자식을 뒤로 한 채 울먹이는 표정으로 화장터를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가련하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 행복한 이혼이다. 끝내 프랭크의 손을 잡지 않은 에블린과는 달리 토고는 과감히 도덕적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
<레드>의 미학적 야심은 운명적 사랑의 대상이 부재(쿠라카의 죽음)했음에도 '그 사랑'을 선택하는 토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속여온 지난 과거, 사회적 제도에 따르기 위한 위선적인 모습, 행복을 알지 못했던 그때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한 여성의 확고한 의지'인 것이다.
어딘지 모를 설원이라는 공간은 사회로부터,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공간이다. 감독은 이 공간에 있을 때, '토고'가 잠시나마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오직 죽어가는 '사랑'을 위해서. 사라져가는 붉은 노을빛을 보며 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토고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필연적인 사랑은 가족, 결혼과 같은 사회제도(도덕)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끝내 자신의 피가 흐르는 대상이 아닌, 피로 물든 대상(죽음)의 사랑을 따르기로 한 토고가 아직까지도 아른거린다. 적어도 그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
한편으로, <레드>의 결말이 '토고의 얼굴'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아사코>(2018), <하나레이 베이>(2018),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줘>(2018), <비가 그친 후>(2019)가 동시에 떠올랐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연상은 단순한 우연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위치한 '이들의 영화 속 여자의 움직임과 얼굴'은 표층적으로 현재 일본 감독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영화적 맥락을, 또 그 안에는 관객의 응답을 기다리는 듯한 미묘한 결말을, 더욱이 그녀들의 얼굴은 무언가를 바라고자 하는 것이 아닌 스크린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하는 듯한 강렬한 이미지로서, 작품의 존재를 확고히 세우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숨어 있다고 느껴진다. <레드>는 분명 앞으로 일본영화를 더 지켜봐야 하는 확신과 비전을 주는 작품이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