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플랫폼' 저 공간 너머
'더 플랫폼' 저 공간 너머
  • 배명현
  • 승인 2020.05.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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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 라이트>(2015)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시스템이야 시스템에 집중해" 시스템이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세계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자본이 세계를 움직인다(인간의 자유의지나 인류애 따위를 말하는 순진함은 결코 이 세계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정치적 역량이나 실존의식이 아닌 시스템이다. <더 플랫폼>은 명약관화하게 이 시스템에 집중한다.

<큐브>(1997)를 생각나게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 정신병원을 생각나게 한다(이들은 스스로 이 곳에 들어왔다는 점을 들어 정신병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방이 시멘트로 지어진 구조물에 두 사람이 갇혀있다. 이 방의 특이한 점은 방 중앙에 뚫린 구멍이다. 위아래로 정사각형 모양의 구멍은 엘리베이터 양쪽에 놓인 거울을 생각나게 한다. 구멍의 끝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무한한 공간 처럼 보이는 것이다. 탈출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공간에서 인물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살아남아야 한다.

 

사진 ⓒ 씨나몬(주)홈초이스
ⓒ 씨나몬(주)홈초이스

이 무한히 이어진 구멍의 용도는 식사가 전달되는 통로이다. 건물의 꼭대기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아래층을 향해 내려간다. 하지만 단 하나의 목적성을 위해 존재하는 물자체는 없듯이, 구멍 또한 다양한 목적으로 변이된다. 자살을 위한 통로로 이용된다.

이 통로는 다른 층과 소통을 위한 창구로써 쓰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인물들은 오로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몫을 챙기려 할 뿐이다. 인물들은 소통과 타협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위층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해 보인다. 위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을 필요이상으로 섭취하려한다. 위층 사람들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아래층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몫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몇이나 자신의 몫을 자발적으로 줄이겠는가. 하지만 아래 층으로는 협박이 가능하다.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은 음식에 똥을 처바르겠다는 협박은 그렇기에 유효하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점은 위층 사람들의 식량 독식이 아니다. 한 달이라는 기한 후 어디로 이동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알듯 자본주의의 수많은 문제 중 하나는 다음 세대로 부와 빈이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설국열차>(2013)는 명백히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더 플랫폼>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1층이던 최하층에 살던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 순전히 운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진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주인공 또한 불규칙하게 층을 배정받는다. 하지만 이 건물에서 핵심으로 생각해야 할 지점은 공정이다. 누구에게나 한달이 주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부의 대물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기한의 공정함은 영화의 키포인트이다. 이 공정성으로 영화는 공산주의 vs 자본주의 대결을 벗어나게 된다.

이 구덩이에서 주어진 선택권은 별로 없다. 그냥 주어진 먹거리를 먹으며 살던가 그냥 죽던가. 심지어 영화 마지막에 정확히 배분을 해 내려갔음에도 음식은 부족해진다. 예상보다 층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건물 시스템 관리 조차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애초에 250층을 예상했던 그들의 배분은 비참할 만큼 모자르다. 층은 333층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자람은 정확하다. 이 음식들은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고려해 주어진 정확한 몫이었다.

 

사진 ⓒ 씨나몬(주)홈초이스
ⓒ 씨나몬(주)홈초이스

영화는 모종의 특정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스템 그 자체를 공략한다. 우리에게 시스템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에게 물음표를 그리게 한다. 주인공은 건물의 최하부까지 내려가기로 한다. 살아남아야 하는 마지막 한달을 그는 편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룸 메이트(?)와 통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 때 영화는 질문한다. 당신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을 수 있는가.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탈출이 확실히 보이는 기간에 죽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주인공과 룸메이트는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 최하부 까지 내려간다. 그들이 마주하는 인물은 한 아이이다. 주인공과 룸메이트는 이 아이를 위로 올린다. 이 아이가 메세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스스로 메시지의 전달자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아이 혼자 통로를 타고 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결말은 열린 결말일까.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발악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안에 속박될 수 밖에 없다는 암담함을 전한다. 메시의 전달자가 없다면 메세지는 부유할 뿐이다. 부유하는 메세지는 멋대로 편집되고 짜깁기될 뿐이다(우리가 미디어를 공격할 때 늘 하는 소리가 짜깁기한 뉴스, 글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건물의 최상단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설사 아이가 안전하게 건물의 관리자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풀릴지 알 수가 없다. 아이라는 미확정적 타자에게 미래를 온전히 맡긴 것이다.

웃긴 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특히나 ‘아이’를 믿는다는 것이다. 수 많은 감독들이 다음세대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하는 어린 아이 엔딩 클리셰는 악취미에 가깝다.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을 다음 세대로 인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비판받는 부분은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시나리오 상 문제는 차치하고서, 자신이 만든 윤리적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만 만들고 떠나버린다.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은 대의적으로 옳다. 너무 새삼스럽다.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오랜시간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씨나몬(주)홈초이스
ⓒ 씨나몬(주)홈초이스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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