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일상을 이해하는 반복의 과정
<패터슨> 일상을 이해하는 반복의 과정
  • 김수진
  • 승인 2020.05.22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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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터슨'(Peterson, 프랑스 외, 2016, 118분)
감독 '짐 자무쉬'(Jim Jarmusch)

여기 일란성 쌍둥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머니는 그들에게 똑같이 초록색 티셔츠에 새빨간 바지를 입혔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닮았다'는 개념으로 모든 것이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닮은 형태를 가졌으나 전혀 다른 존재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똑같다'는 수식어를 쉽게 붙이지만, 명백히 다르다. 어머니가 쉽게 분간할 수 있는 이유도 그렇다. 모성이라는 본능에 의지했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오래 관찰하며 보살펴온 어머니는 그들의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패터슨>의 영화 글 서두에 무슨 사족인가 싶겠다. 물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쉽게 눈치챌지도 모른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많은 비평가는 이 영화의 차이와 반복에 대해 언급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본 글에서는 앞선 글들과 차이를 두며, 한 걸음 나아가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보다 일찍이, 영화이론에 관심 많았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차이와 반복 개념을 복합적인 이론으로 확장했다. 여기서 그의 논문을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특정 영화들을 통하여 들뢰즈의 이론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쌍둥이 일화'처럼, 우리의 일상과 이를 비추는 영화 속에는 숱한 '차이와 반복'이 부유하고 있다. 쌍둥이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다. 이 영화는 우리를 둘러싼 차이와 반복을 '관찰'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준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패터슨>의 뚜렷한 스토리는 없다. 그저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가 좋아하는 시는 ⟪패터슨⟫'이라는 영화적 사실만 주어진다. 감독 짐 자무쉬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패터슨⟫을 좋아한다. 이처럼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부터 차이와 반복에 기인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의 운율성은 기본적으로 차이와 반복의 개념에 충실한 예술이다.(영화는 현대판 '시'라는 이야기를 떠올려봐도 좋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의 구도는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쳇말로 '복붙'(복사와 붙여넣기)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시간(변주되는 인물이나 상황)으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시퀀스는 변용된다. 시퀀스의 시작점은 이 작품의 중심인 버스기사 '패터슨'과 그의 부인 '로라'가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모습이다. 부부는 침대 위에서 대칭성을 띠며 마주 보고 누워있다. 그가 그녀를 키스로 깨우면, 그녀는 지난 밤의 꿈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아이가 '쌍둥이'이었다는 이야기다.

식탁 위에 아무렇게 놓인 성냥갑부터, 함께 사는 자신의 아내 그리고 버스 승객들까지. 그는 주변을 관찰하고 반작용처럼 틈틈이 시를 쓴다. 마을 이름마저 자신의 이름과 같은 패터슨인 그곳에서 매일 같은 경로로 운전하여 삭막한 도시를 횡단한다. 노동 후 퇴근한 '패터슨'은 부인 '로라'가 있는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그의 자명한 현실이다. 반면 그가 쓰는 시는 잠재적 주체가 생산하는 공상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라는 속박도 모자라 결혼이라는 속박은 어떤가. 하루만에 취향이 바뀌는 아내로 인해 시시각각 집안의 인테리어가 바뀐다. 결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굴레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퇴근한 '패터슨'은 식사를 하고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반복된 패턴의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그 일상의 끝에는 습관처럼 단골 펍에 들려 맥주 한잔 즐기는 게 전부다. 어느 날 펍 주인은 스포츠 중계를 보며, '두 개'의 팀 중 누가 이길 것 같냐는 패터슨의 질문에 '나 자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후 등장하는 블랙아웃의 'pause'(잠시 멈춤)는 그의 일상에 또 다른 국면을 암시하는 일종의 신호로서 관객의 사유를 이끈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나답기. 나 자신을 지키는 것. 그러니까 흑과 백, 이분법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나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패터슨'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느 영화처럼 이 영화는 어딘가 불안한 인물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극히 철학적인 이 영화가 비교적 관객에게 쉽게 읽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일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각각의 유사 시퀀스는 다르게 변용되며 영화 전체는 느리지만, 점증적으로 나아간다. '패터슨'이 짓는 시의 내용 역시 또 다른 국면으로 나아간다. 그의 평범한 일상을 횡단하는 다양한 차이들 또한 하나 둘 관찰된다.

'패터슨'의 버스를 탄 승객들의 일상적인 대화 장면은 (마치 죽은 시간처럼) 꽤 오랜 시간 프레임에 담긴다. 물론 매일 포착되는 승객은 달라진다. 카메라의 시선은 말하고 있는 그들의 형태들, 즉 바스트 숏(Bust Shot)과 그들의 발에 머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패터슨'에 표정에도 집중한다. 결국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집중은 주변에 대한 관심, 다른 개체에 대한 이해로 전이된다. 일상 속 관찰을 통해 변해가는 그의 내면. 이를 드러내는 수단이 바로 '시'이다.

'패터슨'(인물과 마을)의 삶은 그저 하나의 수평적 흐름이다. 스포츠 경기의 두 개의 팀 중 어떤 팀이 이기는지나, 사회로부터 규정된 하나의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방식은 '초월론적 경험론'이다. 반복되는 경험 안에서 초월적인 차이를 발견하는 흐름 그 자체가 삶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수직적인 위계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평행한 삶의 흐름 속의 우연한 만남과 관찰의 결과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나 자신만의 흐름을 잃지 않을 것을 역설한다. 나의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흐름 속에서, 유일한 것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때의 관계성이란, 우연한 마주침, 차이에 의해 이뤄진다. 버스 안에서 무정부주의 학생들을 마주친 그때, '패터슨'의 손목시계의 침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쇼트처럼. 차이는 시간을 흐르게 한다. 이러한 차이는 비슷한 듯 다른 형태로 일정한 틀 안에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그러나 반복은 복제와 다르다. '로라'는 '패터슨'에게 여러 차례 시를 쓴 노트를 복사해놓기를 바란다. 그의 시는 훌륭하다는 맹목적인 칭찬과 함께 말이다. '로라'는 거의 강박증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반복되는 패턴의 커튼이나, 컵케익 장식 등등. 이러한 차이는 '패터슨'이 옳고, '로라'가 그르다의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무의식(꿈)과의 만남을 통해 로라는 자신을 취향을 바꾸곤 한다. 영화 속 '로라'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도 '로라'와 '패터슨'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를 것이다. '로라'는 '패터슨'이 아니고 '패터슨'은 '로라'가 아니다. 두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끝내 '패터슨'은 시를 복사해놓지 않았다. 그게 '로라'와 '패터슨'의 차이의 결과다. 일주일간 스스로 겪은 경험들을 통해 '패터슨'은 무언가를 깨달았기에 더욱더 복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만의 흐름대로 '시'를 있는 그대로 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흐름에 따라 강아지는 유일한 시 노트를 찢어버린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결과를 (이 영화 속의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서 '패터슨'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와 또 다른 시간을 반복하며 차이와 마주칠 준비를 한다. 잃은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지만, '패터슨'의 삶은 '로라'와 다른 이들과의 '공존' 속에 또 반복된다. <패터슨>이라는 차이를 목도한 관객들의 일상도 다시 시작된다. 억지로 바꾸는 것 없이, 간격을 지닌 각각의 평행적 흐름을 유지하면서.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코아르CoAR 김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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