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막이 내릴 때' 불타버린 시체의 기억
'기도의 막이 내릴 때' 불타버린 시체의 기억
  • 오세준
  • 승인 2020.05.21 0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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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고백하자면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가 읽은 그의 소설은 오직 '용의자 X의 헌신'뿐이다.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 글은 원작과의 비교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히기사노 게이고의 인기 시리즈인 '형사 가가'에 대한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본 TV 드라마 역시 언급할 생각이 없다.

필자의 입장과 같이 '히가시노 게이고'를 모르는 관객이라면,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보기가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겠다. 특히, 이 영화가 작가의 소설(형사 가가 시리즈)과 일본판 TV 드라마를 통틀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이 그러하다. (영화의 주인공인 '가가'를 연기한 '아베 히로시'는 모든 TV 시리즈에서 역시 형사 '가가'를 연기했다.) 그러나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앞서 언급한 부분들을 모르고 봐도 무방할 만큼 큰 연계성을 가지지 않는다.

 

2.

영화의 시작은 '두 개의 시체'의 등장과 그것들의 연관성을 찾는 형사 '마츠미야'(미조바타 준페이)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시체의 교집합에 연극 연출가 '아사이 히로미'(마츠시마 나나코)가 있다는 것을 찾아 낸다. 그리고 극단 안에 위치한 그녀의 방에서 우연하게도 그녀가 자신의 사촌 형이자 형사(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가가 쿄이치로'(아베 히로시)와 함께 찍힌 사진을 발견한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이 사진 위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

 

가가와 마츠미야,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가가와 마츠미야,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드라마'를 찾기 위한 수사

제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 꽤 긴 오프닝은 단순히 '가가 형사'를 등장시키기 위한 '마츠미야'의 빌드업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한 '오독'이다. 이런 영화의 구성(감독의 편집)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23분 정도의 긴 오프닝'은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출입문의 역할도 가지지만, 집중해서 봐야 할 인물과 사건의 음모를 관객들에게 과감히 표출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마츠미야는 "이 사건은 호수 바닥에 있는 자갈 하나를 찾는 듯한 그런 복잡하고 단서를 잡기 힘든 사건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풍기는 불안감'은 마츠미야가 가진 온전한 감정이라 생각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마치미야의 등장 이전에 '가가의 어머니'인 유리코가 집을 나와 18년 동안 혼자 살아왔던 이야기의 전개, 특히 '가가'가 뒤늦게나마 어머니의 집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엄마의 애인 '와타베'라는 남자의 존재에 대한 '미스터리' 때문이다. 또 이 강력함은 와타베라는 남자가 '니혼바시'에 있다는 언급만을 남긴 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니혼바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뒤이어 쫓아가는 연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마치미야가 느낀 불안감은 '사건이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하지만, 이는 '가가'의 사정(죽은 엄마의 삶을 애인이었던 와타베를 통해 듣고자 하는 간절함, 정확히 '왜 엄마가 집을 나갔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욕망)을 만나서 오히려 미스터리함을 증폭시킨다. 어쩌면 사건의 복잡함이 가가의 사정으로 '삼투되어 진다'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의문의 남자'와 연이어 등장한 '두 개의 시체'는 분명 별개의 것이 아닌 직감적인 연결이 있음을, 혹은 지속적으로 풍경을 담는 감독의 하이 앵글 쇼트로 환기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있음을 의도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의 영화 전개는 '와타베'라는 남자가 사건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그를 찾는 과정을 담는다. 일종의 형사들의 '수사'인 셈인데, 이 과정을 장르적으로 '추리물'에 비추어 보지 않더라고, 꽤 묘하게 다가오는 지점들이 있다. '와타베'라는 남자를 찾을수록 '아사히 히로미'에게 더 가까워진다는 점과, 와타베라는 남자를 찾는 '가가'의 욕망이 사건의 해결보다는 '자신의 엄마인 유리코가 왜 자신을 버리고 집을 떠났는지'에 대한 진실을 위해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범인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거나 사건의 실체가 수면 위로 오르기보다는, 오히려 '아사히 히로미'와 '가가'가 지닌 사연('드라마'에 가까운)이 점진적으로 쌓이는 흐름을 보여준다.

 

3.

아시미,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아사이 히로미,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여기서 필자의 질문은 하나다. 도대체 '이 흐름'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우선, 사건의 결말이 지닌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사건은 '아사미 히로미'와 '와타베 슌이치'의 관계 그 자체다. 아사미 히로미의 아버지인 와타베 슌이치, 실제 이름은 '아사이 타다오'다. 그의 아내가 빚을 남긴 채 도망가는 탓에 부녀는 살던 곳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히로미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를 죽이게 된다. 여기서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그 남자로, 그 남자를 자신으로 위장한다. 그리고 딸에게는 자신이 죽었다고 경찰에 알리도록 지시한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평생 떨어져 지내야 하는 삶을 맞이하지만, 딸의 신분이 노출되는 과정에서 그녀의 교사, 친구를 연이어 살해한다.

이 영화의 수사는 '아사미 타다오', 아사히 히로미' 부녀가 벌인 살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가와 마츠미야가 찾아낸 단서들은 부녀가 몰래 만나기 위한 암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처음 등장한 썩은 여성의 시체는 타다오가 죽인 히로미의 친구이고, 나머지 불타버린 시체는 누구의 것일까. 그 시체는 바로 용의자이자 범인인 '아사미 타다오'이다. 그러나 타다오는 불에 타기 전에 딸인 히로미로부터 목에 졸라 죽는다. 이 부분에서 타다오가 자살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언젠가 들통날 살인, 위장을 한 채 26년을 숨어 살아온 삶에 지친 탓이다. 그렇다면 히로미는 왜 자신을 위해서 희생한 아버지를 죽여야 했을까.

과거 타다오가 "불타 죽는 건 무섭다"라는 말 때문이다. 타다오가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뿌린 채 불을 붙여야 하는 순간, 적어도 아버지가 고통스럽게 불에 타서 죽지 않도록, 자신이 직접 손으로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기에.

다시, 부녀의 진실, 이 가족의 비극적인 드라마는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모든 이야기라 불러도 무방하다. 영화의 흐름란 것은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 가족이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는지를 수사물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지독하게 파헤치는 것이다. 즉, 수사물을 위해서 가족의 이야기(범죄나 사건의 해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 이 가족의 이야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수사물이라는 장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관객인 우린 수수깨끼를 풀거나 증거에 입각해 범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함의 자리가 아니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파편적으로 응시하기 위한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감독의 의도'든,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의도'든 구분 없이 생각해보자면, 이 흐름은 두 인물의 가족사를 계속해서 건들고 있고, 이 가족의 해체의 진실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쓰이는 장치들(일종의 트랩)은 서스펜스를 위한 도구적인 쓰임일 뿐 어떠한 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영화 역시 수사물을 위한 서스펜스이기보다는 '가족사'를 숨긴 채 장르적인 변신술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 내에서 히가시고 게이고를 두고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논쟁이 이같은 전개 방식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가가는 히로미로부터 자신의 아빠가 남긴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에는 가가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이 담겨 있다.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이유. 그건 아버지의 탓도, 자신의 탓도 아닌 오로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다. 버틸 수 없는 우울감에 자기 아들과 자살을 시도하려 했던 일로, 그녀는 자신 존재가 아들에게 위험하다고 깨닫고 가족을 떠난 것이다.

 

4.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변에 우뚝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 논밭 한가운데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어쨌든 여러 헛간들이 말입니다. 십오 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지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문학동네) 中 '헛간을 태우다' P68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고작 '영화의 전개 방식'에 대한 이해가 영화의 전부라 생각한다면, 이 역시 오독이다. 이는 지극히 내러티브적인 관점으로의 해석에 불과하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관객인 우리가 더욱더 유심히 봐야 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알레고리다.

이 영화에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가가'의 가족과 '히로미'의 가족. 두 가족은 공통적으로 '엄마의 도망'이 가족을 해체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족의 해체 안에는 '희생과 죽음'이 자리한다. 또 해체를 유발하는 것도 부모이며,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오로지 부모이다. 물론 그것으로 인한 후유증은 '자식'의 몫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히로미와 가가가 가족의 해체와 부모의 희생을 바라보며 겪은 후유증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이 꽤 노골적이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장면이 있다. 수사본부에서 가가와 마츠미야의 대화인데, 이 과정에서 마츠미야는 이런 말을 한다. "두 사람은 끔찍한 경험을 한 부녀인 만큼 강철 같은 유대감이 있었을 텐데"라고. 이때 카메라는 마츠미야의 얼굴을 담는다. 그의 얼굴에는 '결코 히로미가 자신의 아빠를 죽일 수 없는 확신'이 담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숏-리버스 숏'으로 퍼즐을 맞춰가는 샷의 전개가 아닌, 또 와이드숏으로 수사본부 전체내지는 관객에게 알리는 의미로의 '와이드 숏'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함을 가진다.

마츠미야의 클로즈업에는 '저항이나 의심'과 같은, 가가의 말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가 숨어 있다. 또 이 태도는 '가족이기에 차마 그럴 수 없는'이라는, 어쩌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혈연‧운명 또는 애정의 공동체로의 의미) 즉, '딸인 히로미가 아버지를 목을 졸라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관객의 입장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마츠미야'의 대사처럼.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히로미가 아버지를 죽인 행위'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해보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시가미 데츠야'가 '하나오카 아스코 모녀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노숙자를 살해하는 행동. 일단, 히로미와 데츠야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이들의 감정이 소설 밖인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두 사람에게는 '사랑'에서 비롯된 '구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히로미는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오카 역시 데츠야의 도움으로 전남편을 살해한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한편으로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이런 부분에서 <용의자 X의 헌신>을 경유해서 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의 경우, 모녀의 살인을 덮어준 이시가미는 되려 모녀로부터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었고, 그가 모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행동으로 도출될 수 있던 것이다. 이시가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는 분명 우린 느끼고 확인할 수 있다. 26년 동안 숨어 지내며 살인까지 저질러 딸을 보호하고 했던 히로미의 아빠는, 딸과 자신의 관계를 지탱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해체를 막고자 하는 존재로, 또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혈연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존재로 강력한 부성애를 보여준 인물인 것이다. 영화는 부녀를 통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모습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 속 살인을 저지른 아들 '도준'(원빈)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엄마'(김혜자)를 통해서 비슷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5.

그렇다면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어떻게 봐야 할까. 영화가 끝내 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고민은 단순히 잔혹한 부성애라는 결론과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

'검게 타버린 아빠의 시체'를 다리 밑에 방치해놓아야 하는 히로미를 통해서 관객인 우린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질문에 봉착한다. 히로미는 자신이 모성애가 없다며, 임신했을 때 아이를 지웠다고 말한다. 우린 단순한 비극적인 이야기의 어떤 주인공쯤으로 그녀를 봐야 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가족을 이루는 데 실패하는 그녀의 모습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위치는 영화 초반에 등장한 가가의 어머니와 같은 위치 선상에 있다. 히로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가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가가에게 전해주는 장면은, 결국에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슬픈 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히로미가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행위는 암컷 사마귀가 짝짓기하는 동안 수컷 사마귀를 먹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본능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행위의 물음은, '가가 형사가 도대체 왜 엄마는 집을 나갔는지' 묻고자 니혼바시에서 떠나지 않고, 엄마의 애인이었던 히로미의 아빠를 찾고자 하는 행위로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엄마의 편지를 통해서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마주하는 가가의 모습을 통해서, 해체되었던 가가의 가족이 히로미의 가족을 통해서 봉합되는 과정.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비극적인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가족'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습하는 것이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불에 타서 새까매진 히로미 아빠의 시체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죽었지만, 영화는 그의 기억을 고스란히 복원한다. 그의 기억은 가족이라는 지킬 수 없는, 유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운명 위에 자리한다. 이어서 히로미의 기억, 가가의 기억, 가가의 엄마와 아빠까지. 사건의 단서들은 가해자를 찾는 도구인 동시에 두 가족을 진실 위에 다시 구축시킨다. 이 모든 건 더는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가족이란 의미'를 기어코 죽음이 동반하도록 설계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가진 기질을 순화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채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표현해낸다. 이 움직임은 공격적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가족의 파괴가 아닌 흐릿해져만 가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소생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의미를 구현해낸다. 그것이 '다리', '터널'과 같은 '연결'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지나 모든 진실이 담긴 히로미의 마지막 연극이 끝나는 무대까지. 우리가 본 것은 어쩌면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태워지지 않는 잔재들의 모습이 아닐까.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사진 ⓒ 노바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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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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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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