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회고전] '베를린 천사의 시' 천사의 존재
[빔 벤더스 회고전] '베를린 천사의 시' 천사의 존재
  • 배명현
  • 승인 2020.05.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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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 독일, 1987, 130분)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Ernst Wilhelm Wenders)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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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버드아이 뷰로 시작한다. 천사의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곧 이어 어린아이 몇몇이 건물 옥상에 위태롭게 서있는 천사를 목격한다. 이 천사는 베를린을 돌며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른 동료 천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간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한다.

이 둘의 이름은 다마엘과 카시엘이다. 다마엘은 천사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을 욕망한다. 그는 말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싶어. 바로 지금 더 이상 '영원'이란 말은 싫어." 그는 천사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을 살고자한다. 유한한 시간에 한정되고자한다. 끝을 정해두고 삶의 순간순간을 살고자한다. 유한이란 것의 아름다움과 순간의 발화를 소망한다.

이 욕망은 마리엘이라는 여인을 만나며 극대화된다. 서커스의 공중 그네를 타는 그녀를 보고 다마엘은 인간이되기를 선택하려한다. 하지만 카시엘은 극단적으로 그를 말린다. 천사의 임무와 목적을 이어가라 한다. 거리의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온갖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 상념에 휨싸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생을 살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끝이 날 줄을 모른다. 천사의 무능함은 이들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짓게 한다.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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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목적이 인간의 삶에 어떤 위로를 주기 위함이라면 이들은 필요가 없다. 존재론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천사가 존재하니 조물주 또한 존재할 것이라 가정한다면, 이들 천사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을 목적론적 세계관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자칫 조물주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큰 힘이 이들 존재의 이유를 찾아 나서는 '로드무비'이다.

영화는 이 물음으로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며 끝을 향해간다. 다마엘은 결국 천사라는 존재 대신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다. 자신의 무능과 존재에 대한 '몸'적 역할을 찾아 기꺼이 죽음에 가까워진다. 위대한 정신 혹은 이데아가 아닌 물자체가 되기를 선택한 그는 이제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만지고 느끼며 세상을 온 몸으로 느낀다. 영화는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뀌며 그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관객 또한 느끼게 해준다.

이 지점은 2시간이 약간 넘는 러닝 타임 중 4분의 3이 지나서이다. 길고긴 천사의 고민은 영화의 후반에 결정된다. 다마엘은 천사로서 입었던 갑옷을 싼 값에 고물상에 넘긴다. 그 돈으로 마리엘을 찾아간다. 그녀는 홀로 있던 시간이 외로웠다며 다마엘과 대화를 나눈다. 마리엘은 다마엘을 보며 선택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둘만이 아닌 어떤 것을 형상화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 있고, 우리가 결정을 하는 거예요. 모두의 운명을요. 저는 준비가 되었어요. 지금 결단을 내려요. 더 이상 기회는 없어요."

그녀는 쇼트 리버스 쇼트로 대사를 치는 것이 아닌.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관객과 눈을 마주치며, 관객을 천사에서 인간이 된 다마엘로 생각하면서 전달한다. 영화는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고 서커스를 연습하는 마리엘이 나온다. 또 카메라는 그 아래서 그녀가 올라탄 줄을 잡아주는 다마엘의 모습을 비춘다. 그는 결연한 눈으로 마리엘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천사의 시점이 아닌, 땅에서 밧줄에 매달린 그녀를 올려다 보는 다마엘. 그는 더이상 무능한 천사가 아니다. 이 땅에 다리를 붙이고 밧줄로 은유된 인간의 외로움과 고난을 당긴다. 그리고 그의 여인이 조금더 하늘에 가까워지게 돕는다.

이제 그의 역할은 인간의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밧줄을 당기며 독백한다. "유한한 생명의 아이가 아닌, 영원한 이미지를 잉태했다." 무한한 생을 버리자 유한한 의미가 생겼다. 그는 그녀와 함께 하며 두 사람이 아닌 둘이 하나가되는 영적 경험을 하게되었다는 뉘양스의 말을 한다. 천사는 유한한 삶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을 배웠다.

영화의 엔딩은 다마엘의 친구인 카시엘을 비추며 끝난다. 그는 따분해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인간에게는 이야기 꾼이 필요하다고. 그 이야기 꾼이란 천사를 가리킨다. 하지만 영화에서 온통 천사는 무능하게 표현되었다. 심지어 다마엘은 '그 어떤 천사도 알지 못한 둘 이라는 존재'라는 글을 쓰며 적는다. 이 둘의 대조는 명확한다. 자신의 벽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담근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부각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어쩌면 조롱일 지도 모른다.

러닝타임 내내 시적 대사로 가득한 이 지독한 영화의 각본은 감독 '빔 벤더슨' 본인과 작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 이다. 둘이 만들어낸 '문학적인 영화' 는 단지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 영화는 읽을 수도 있다. 기존 영화에서 해체된 장면 연결과 대사는 이 영화를 독해하는데 어려움이지만 기존 영화의 문법이 고루하게 느껴질 만큼 신선하다.

지금 이 영화는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빔 벤더슨 회고전 - 길 위에 선 사람'(2020.5.13 ~ 31)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되고 있다. 독일 현대 영화의 거장 빔 벤더슨의 대표작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만나보고 싶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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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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