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사냥의 시간> 논쟁에 대해서
[PICK!] <사냥의 시간> 논쟁에 대해서
  • 오세준
  • 승인 2020.05.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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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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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동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는 <사냥의 시간>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없다.

우선 <사냥의 시간>의 개봉에 대한 몇 가지 사건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개봉까지의 과정이 꽤 고약했다. 영화의 홍보가 활발히 이뤄지는 중에 코로나19 여파로 개봉을 미뤄야 했으며, 해외 판권 세일사인 콘텐츠판다로부터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으로 소송이 진행되면서 연이은 악재를 맞았다. 그리고 극장과 넷플릭스, 두 차례 상영의 지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더 증폭시켰다. 그러나 <사냥의 시간>의 논쟁은 이 같은 과정이 모든 원인이라 부를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 수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필자의 변화 없음'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번 논쟁은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다. 영화에 대한 논쟁은 '작품의 완벽성'과는 별개로 늘 발생했다. 다만,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SNS 활성화, 또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의 발달, 언론 매체의 자극적인 기사들이 논쟁의 크기를 본격적으로 키웠다고 본다.

특히, 사람들이 영상 플랫폼으로 점차 소통하고 공유하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영화에 대한 각종 리뷰‧해석 영상과 2시간 분량의 영화를 10분 안팎으로 요약하는 영상이 하나의 장르적인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관객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닌, 타인의 체험을 자양분 삼는 현상이 잦아지도록 유발했다. 이러한 현상은 작품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 역시 줄어들면서 일종의 '간접적 체험의 관객'이라는 자리를 형성했다.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사이트, 또 브런치, 블로그 등 기록으로의 플랫폼 또 CGV 골드에그, 왓챠, 키노라이츠 등 한줄평이나 별점을 메길 수 있는 메타크리틱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결코 주류라 불릴 수 없다. 이들은 집단의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개인으로 활동하기 때문. 성격 자체도 맥락을 형성하기보단 후기나 소감을 전하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많은 영화홍보사가 자신들의 홍보 전략으로 여러 블로거나 소셜 계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에 대한 평을 의뢰하기에 더욱이 '작품에 대한 명확하거나 객관적인 평가'를 찾기는 힘들다.

중요한 건, "'무엇'이 지속해서 논쟁의 크기를 키우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 안에는 위와 같은 과정에서 도출되는 비평의 장소 부재가 방증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극장에서의 체험'의 부재에 따른 여파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로지 눈이 스크린만을 향해야만 하는 체험에서, 화면의 외적인 요소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해진 체험. 더 나아가 '화면의 크기나 사운드의 질'과 별개로 영화를 보는 호흡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작품을 한 번에 보는 것이 아닌 나눠서 보는) 작품을 보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감독이 의도한 방향(긴 호흡으로 봤을 때 느낄 수 있는)과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완벽히 영화를 보았다'는 말이 무색해진 것이다.

<사냥의 시간>이 가지는 논쟁은 현재 한국의 영화 비평 장소가 부재함을 보여주는 단전인 현상이며, 극장을 잃은 관객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는 <군함도>나 <나랏말싸미>와 같은 역사왜곡 문제와는 다르다. 또 <82년생 김지영>, <걸캅스>가 겪었던 페미니즘 논란과도 다른 위치에 있다. 어쩌면 앞으로 OTT에서 개봉하는 상업영화들이(거대 스튜디오나 거대자본이 투입된 작품) 겪어야 하는 현상으로, 또 실험적인 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 관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진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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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선

"이걸 120억에 샀다고?", "관객의 시간을 사냥하는 영화", "이 배우들로 술래잡기라니", "파수꾼의 영광은 어디 가고", "캐릭터의 개연성 부족vs재미있는 심리 스릴러", "핵꿀잼vs핵노잼", "긴장감↑vs상투성 발목", "SF 디스토피아에 대한 모독입니다" 등. 그러나 이런 반응보다 많았던 것은 '영화의 해석'에 대한 제각기 다른 풀이들이다.

분명 <사냥의 시간>은 실패했다. 일단, 극장 개봉에 실패했고, 대중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이는 전자를 재난에 따른 타개책이라 보더라도, 후자의 경우 공통된 단점의 지적이나 관객 개인이 누군가의 해설을 들어야 할 만큼 이해할 수 없음에는 '관객 개인의 역량'이 아닌 영화평론가라 할 사람들의 도움이 기어코 필요했음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수많은 포털사이트의 연관검색어로 '해석'이 있음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앞에서 필자가 실패라 단정 지은 이유에는 단순히 호평보다 혹평이 많아서가 아닌, 작품 자체가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사냥의 시간>은 어려운 영화일까. 그토록 읽기 힘든 것일까. 글쎄. A는 B를 쫓는다. A는 경찰이고, B는 범죄를 저지른 자다. 단순한 구조로 이뤄진 영화는 오히려 이해할 것들이 없는 마치 속이 텅 빈 '공갈빵' 같은 형태를 가진다. 관객은 어쩌면 '영화 속에 채워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불쾌함, 완벽히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등이 섞이면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한'은 누구이며, 주인공들은 왜 쫓기며, '외장하드'나 '자전거'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탄식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잘난척쟁이처럼 지성인이나 문화인을 위한 영화라던지, 상징이나 기호를 파악해야 풀 수 있는 영화라던지 등 특정 관객을 겨냥한다거나 예술작품의 분석법을 공부해야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다 맞다'고 말해주고 싶다. 틀린 게 없다. 그것이 온전히 영화를 다 보고 결정한 생각이라면, 그것이 옳다. 3000만큼.

관객 모두가 내러티브든, 오락이든, 문화적 연구를 위함이든 비평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미학적 분석을 위한 실천 역시 필요치 않다. 영화는 단순히 '하나의 이벤트'다. 아이언맨이 핑거스냅 한 번으로 지구를 위협하는 타노스를 물리치는 순간의 짜릿함처럼, 관객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발생하는 '쾌감'에 오롯히 집중하면 그만이다. 이따금 관객이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극장 문을 나오는 끝에서 '영화가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에 대한 고민뿐이다. 여기서 관객은 타인의 견해를 통해서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코 그 고민을 멈춰서는 안 된다. 타인의 견해가 답이 아닌, 자신이 온전히 결론을 지을 수 있는 힘으로 그 고민을 해결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그것이 극장을 나와, 영화가 보여준 여러 이미지들 속해서 내려지는 결론에 끝에 맞닿는다. 그리고 그제야 영화를 다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사냥의 시간>은 정말 실패했을까?

 

사진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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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의 시선

그렇다면 '영화를 글로 쓰는 종사자', 영화를 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까. 영화글을 읽는 것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 물음에 있다. '누가 더 제대로 해석했냐'나 '얼마나 잘난 척을 하냐'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생각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의도에 따라 필자를 포함한 '코아르CoAR'의 모든 필진들이 <사냥의 시간>에 대한 시선을 담는 실천에 참여했다. 먼저 선민혁 에디터는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을 동시에 다루면서 '윤성현 감독의 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배명현 에디터와 김수진 에디터는 각기 다른 견해로 영화를 균형 있게 써 내려갔다. 그들은 영화가 가지는 리스크를 인지하고 지적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지점과 가능성을 흔들림 없이 주장한다. 전자는 영화가 가진 성취를 인정하는 방향을, 후자는 영화가 내포하는 성질을 풀이한다. 그리고 필자의 <사냥의 시간>에 대한 짧은 글까지. 우리의 시선을 통해서 당신의 시선이 확장될 수 있기를.

 

 

사진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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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세준 기자의 '<사냥의 시간>에 대한 짧은 글'

출소를 하고 나온 '준석'(이제훈)은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물론 교도소 안에서 어느 정도 세상이 흘러갔음을 알 수 있었겠지만, 정작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3년이라는 시간을 대가로 얻은 '돈'이다. 안타깝게도 준석이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돈이 더는 쓸모가 없다는 것', '그 돈의 가치는 3년 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레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자 지표이며, 갈등의 원인이자 주인공들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의 입장은 '준석'의 입장과 똑같아진다. 이 영화의 세계가 왜 망가지고 붕괴하였는지. 영화는 이 물음에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보여지는 이미지가 전부다) 하지만 적어도 '돈'이라는 것, '원'(한화)은 쓸모가 없어졌고, '달러'가 중요해졌다는 것을 그리고 교도소에서의 3년이라는 시간은 더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보상의 부재), 더 나아가 이 나라는 주인공들에게 더는 살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이후로는 관객인 우리가 카메라에 담기는 세계의 이미지를 단서로 수집해야 하는 추론해야 하는 실천만이 남는다.

<사냥의 시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시간의 부재'다.

단, '부재'에 따른 결핍감은 관객에게 추론을 위한 자극으로 작용하면서, 영화의 결말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부재로부터 오는 공허함이란 감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기저에 깔려있으며, 또 이 감정은 영화의 결말을 결정짓는 요소인 것이다. 그들의 쫓기는 이유가 텅 빈 것처럼.(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인 우린 정확히 언제부터 '영화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따른 결핍감보다 '불안감'을 느꼈는가. 이 근본적인 물음의 수행은 사실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 가지는 결과의 뼈대와 같다. '한'이라는 존재가 등장할 때?, 아니, 흥미롭게도 영화는 주인공들이 도박장에서 돈을 터는 것을 성공시키지만, 이상하리만큼 관객의 불안감은 더욱더 증폭시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객인 우린 '부재'에 따른 결핍감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시선을 옮긴다. 매우 자연스럽게.

여기서 우린 '결핍감'보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지속해서 화면 앞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초한다. 물론, 이때까지도 여전히 '세계의 붕괴', '인물들의 과거', 심지어는 장호(안재홍)가 기훈(최우식)의 옷을 입거나 자는 척을 하는 사소한 이유까지. "도대체 왜?"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어떠한 답변도 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더 화면 앞에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주인공들이 한에게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면서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채 이리저리 헤매는 순간까지.

다시, <사냥의 시간>이 가지는 징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설령 주인공들이 도박장을 성공적으로 털었을지라도, 그들의 인생이 나아질 리 만무하다. 그리고 '한'의 정체나 목적, '쌍둥이 형제', '노동자들의 시위' 등의 설정에 나름의 상징을 부여한들 영화의 세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또 결말에 대한 메타포가 '세월호'를 향한다고 한들 영화의 작품성이 사회 고발적인 성격으로 바뀔 수 있을까. 오히려 필자가 느끼는 건 이런 과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영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관객의 '공포'라는 감정을 건들고 있기 위함으로 보인다. 꾸준히.

관객이 공포를 느꼈으니, 다음은 이 공포를 해소할 대상, 즉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하다. 마치 '마녀사냥'과같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준석'이 관객과 같은 위치이기에 그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그 대신에 그의 친구들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야 영화가 끝날 수 있다. 그들은 공포의 밑거름이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사냥>은 근본적으로 부정(否定)의 세계다. 국가의 가치, 사람의 가치, 돈의 가치 등 모든 것이 부정당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들의 삶까지도. 왜 부정당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할 관객의 몫이다. 이는 영화가 관객의 시간을 사냥한 것이 아닌, 이 또한 관객에게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함일지도.

 

사진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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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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