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사냥의 시간> 사유의 시간
[NETFLIX] <사냥의 시간> 사유의 시간
  • 김수진
  • 승인 2020.05.09 1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사냥의 시간'(Time to Hunt, 한국, 2020, 134분)
감독 '윤성현'(Yoon Sung-Hyun)

가시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의 의무가 꼭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통 상업적인 오락영화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바쁘다. 이러한 작품들 사이에서 <사냥의 시간>은 비(非)가시적인 영화로 독보성을 확보한다.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는 것은 명확히 담아냈다. 관객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차이를 통해서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 눈앞에, 한 명의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녀를 '아름답다'고 수식하며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일까. '아름답지 않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슬프게도, 이러한 언어적 양분화는 명료하고 편리해서 우리의 삶 전반을 단순히 구획하는 데 쓰여왔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이처럼 이분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다 '아름다움'의 평가 기준은 또 누가 정하는 것인가. 누군가 세상이 정한 기준이라고 맹목적으로 따르려 한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세상의 잣대에만 의지한다면, 우리에게 영화라는 예술은 더 이상 필요없을 것이라고.

 

사진 ⓒ 넷플릭스
사진 ⓒ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은 인물의 과거를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배경은 IMF로 인해 화폐가치가 폭락한 한국.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습한 그로테스크의 분위기가 디스토피아 사회 곳곳의 민낯을 효과적으로 들추어 낸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것은 일상이며, 총기 사용, 갈취, 도박 등 모든 불법적 행위가 자유롭다. 이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국의 평범한 20대 청춘들은 일종의 유토피아(바다, 혹은 바다가 있는 곳)로 나아가기 위한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단순한 서사구조만 유지한 채 영화는 이외 것을 일일이 말하기보다 '충돌의 몽타주'를 통해 관객 스스로 사유하고 느끼도록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달러'가 되어버린 '디스토피아'. 각종 범죄가 판치는 세계에 두 발 딛고 숨 쉬는 네 명의 청년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무장 강도가 되어 카지노의 금고를 턴다. 여기서 대형 상업영화에서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와 <사냥의 시간>과 같은 B급 영화에서의 '디스토피아'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가 폐허가 되고 이를 배경으로 빈틈 많고 허술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친숙한 모습은 그저 우리의 이야기 같아 더욱더 음울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들은 범행을 시작한다. 물론 프레임 밖의 사회에서 이들의 행위는 결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나 가치는 전복된다. 아니,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는지도 모른 채 이들의 손에는 어느새 총기 한 자루씩 들려진다. 치밀한 범행 계획을 통해 예상대로 금고를 터는 데 성공한다. 이들에게 부여된 뚜렷한 계기는 오로지 생존, 즉 바다뿐이다. 어릴 적 꿈꿨던 '하와이'를 대신할 대만의 '바닷가 마을'. 그곳으로 떠나기 위해선 '항구'로 가 배를 타야 한다.

 

사진 ⓒ 넷플릭스
사진 ⓒ 넷플릭스

네 명의 청년이 '항구'로 향하는 그때부터 '한'(박해수)의 추격은 시작한다. 초원의 지평선 또는 바다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두고, 수직적인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큰 놈이 작은 놈 여럿을 사냥하는 원초적 본능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의 전략적인 토끼몰이에 카메라의 앵글이 상당 시간 머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외면에는 사냥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뚜렷한 목적도 묻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제로'(0)가 된 절망적인 사회에서 구체적인 계기와 목적은 어느새 사치에 불과해진 것이다. 오로지 살고 죽이기 위한 몸짓만이 각각의 시퀀스를 채울 뿐이다.

결국 '한'은 이 작품의 내적, 외적 주제를 이끌어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외연적으로는 등장인물 간의 인류애를 뜨겁게 지핀다는 것. 공공의 적은 언제나 조직을 단합하게 만들기 마련이니 말이다. 본능에 이끌려 살기 위해 '항구'라는 막장까지 달려왔지만, 동물과 달리 감정과 이성이 공존하는 인간에게 살인은 또 다른 (복수를 위한) 살인의 계기가 된다. 종국에는 애초에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였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관객에게 주어지는 당혹감은 결국엔 돌고 돌고는 주체와 객체의 비가시적 소용돌이가 가시화되면서 발생된다.

이러한 전개 속에서 중반부가 조금 지난 시점에 '한'의 정체가 결국 경찰임이 드러났을 때, 우리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무엇일까. 그토록 극악하기 그지없던 자가, 시민을 보호할 의무를 짊어진 경찰이었음이 드러날 때의 '충돌'은 또 다른 사유의 확장을 주도한다. '공포'의 존재가 범죄자들이 아닌, 경찰로 상징되는 '공권력'이라는 실체적 진실이 폭로된다. 그로 인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라고 할 수도 있는, 현실의 비가시성을 관객은 또 한 번 목도하게 된다.

 

사진 ⓒ 넷플릭스
사진 ⓒ 넷플릭스

만일 <사냥의 시간>이 유사한 장르물이 그간 보여준 구체적인 서사로 구성됐다면 어땠을까. 선과 악이 분명한 지점에서 끝내 처치되고 마는 악당으로 비롯되는 권선징악이라는 착한 교훈, 그리고 죽은 친구와 가족에 대한 감정적 순간에 상당 부분 시간을 할애한다면. 정확히 구획된 서사의 틀 속에서, 관객은 이외의 것을 상상할 일말의 기회마저 빼긴 채 그저 영화가 의도하는 대로 끌려가고 말 것이다.

극 중 '준석'(이제훈)이 꾸는 '꿈'처럼. <사냥의 시간>이 담고 있는 환상적 사건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잠재된 무의식적 환영을 불러낸다. 영화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으로 영화가 편입되는 순간이다. 그것이 우리의 과거이든 현재이든, 아니면 미래이든 영화를 통해 관객은 자신의 무의식적 형상들을 잠깐이나마 체험할 수 있다. 기존의 흔한 작품들처럼 영화에게 나의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가시적 허상에 가려졌던 비가시적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냥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잘 만든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수작이 누군가에겐 졸작이 될 수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필자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친절하게 다 보여주는 영화는 '매력이 없음'을 넘어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적 시간을 빼앗아버리고 그 자리에 영화가 만든 시간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는 사유의 여지도 없이 비슷한 형식으로 같은 담론만 반복하는 상업영화 세계 안에 우리를 포획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관객 스스로 사유하게 한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쾌감까지 놓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영화가 비틀어 제시하는 상징성과 비가시성들은 관객이 수동적으로 사유하도록 적절히 인도한다. 궁극적으로 단선적인 서사는 불친절하고 게으른 결과가 아닌,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친절함의 결과다.

 

사진 ⓒ 리틀빅픽처스
사진 ⓒ 넷플릭스

 

영화 비평지 씬1980 편집위원 김수진
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광주로 내려와 영화 비평지 씬1980(scene1980)을 창간해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영화이론도 연구 중입니다.
[씬1980: 광주영화비평지, blog.naver.com/filmsolidarity8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