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시간을 머금은 얼굴 ①
[클린트 이스트우드] 시간을 머금은 얼굴 ①
  • 배명현
  • 승인 2020.04.23 0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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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감독론
사진 ⓒ IMDb
영화 '더티 해리4-써든 임팩트', 사진 ⓒ IMDb

많은 얼굴들이 영화와 함께 늙어갔다. 그리고 21세기에 여전히 영화를 활발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중 클린트이스트 우드는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000년 이후에만 17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놀라운 열정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단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여전히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움이 있다.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놀라움은 무엇일까. 이 지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의 연대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배우 출신의 감독이다. 미국의 웨스턴 장르가 저물고 이탈리아에서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가 떠오를 때 그는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3부작.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무법자>(1965), <석양에 돌아오다>(1966)라는 명작은 그를 스타의 반열로 올려두었다. 하지만 당시 스파게티 웨스턴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미국의 서부 역사를 다루지도 인디언이 나오지도 않는 스파게티 웨스턴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린트이스트 우드는 서부를 자신의 영화에서 새롭게 탄생시킨다. 서부 장르가 완전히 전멸하다시피한 92년에 말이다. 장르영화 중 하나로 취급 받던 서부가 그의 손을 다시 등장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이다

 

사진 ⓒ IMDb
영화 '호건과 사라', 사진 ⓒ IMDb

이 영화에서 그는 전통 웨스턴 장르의 아버지 존 포드와 스파게티 웨스턴의 뿌리 세르지오 레오네 둘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웨스턴 장르 뿌리인 돌아온 탕아, 그리고 인디언이 나오지 않고 어떤 강등 상황으로 인한 대결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 대한 변주가 강하게 느껴진다.

고전 웨스턴에선 대결이 아무것도 아닌 강자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윤리의 경계를 가르기 위해 삽입한 장치이다. 그렇다면 악을 처단한 주인공이 정의인가? 그렇지 않다. 명백한 악당이 존재하지만 무방비한 상태의 적을 처단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손을 씻는다. <리버티…>에서 제시한 서부개척 시대가 가고 법치의 시대가 왔다는 지점과 크게 상응한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는 본인에 대한 변호 또한 영화로 하는 사람이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는 어떠한가.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영화로서 변호하고 있지 않은가.

 

사진 ⓒ IMDb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사진 ⓒ IMDb

특히, 그는 2000년대 이후로 정치적인 굵직한 작품들을 뽑아낸다. <미스틱 리버>(2003),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아버지의 깃발>(2006),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범죄 윤리, 안락사, 전쟁과 인간을 다룬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영화는 성숙해진다. 공화당을 지지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의 영화는 진보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설득한다.

<그랜 토리노>(2008)는 어떠한가.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빌리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리 써둔 유서를 보았다"라고 표현할 만큼 자신과 그 다음세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는 전쟁에 대해 미국보단 군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미시적 접근은 늘 그의 장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정치적 지지와 그 반대의 이야기를 세련되게 풀어 사람들을 설득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최근 영화 <라스트 미션>(2018)은 설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배우로서 등장하는 영화에서 한 번도 완벽하게 늙은 상태로 등장하지 않았다. 늙은 몸이지만 늘 힘이 있었다. 강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라스트 미션에서 만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성일은 필로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스트 미션>은 이야기 안에서, 시퀸스 사이에서 그때마다 각각의 방식으로 영화에서 이스트우드 자신이 어떻게 실존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방법의 미학을 발견한다" <라스트 미션>은 그의 실존, 그러니까 그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담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연장선인 동시에, 어딘가 홀로 존재하고 있는 듯한 섬과 같다.

늙어버린 육신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 영속성을 통해 나아가려는 것. 끝이 아닌 새로운 방향을 확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 영화적 틀을 바꾼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앞서 말한 노년임에도 지난 삶을 정리한다기보다 남은 생의 방향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러나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영화 '라스트 미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라스트 미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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