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미야케 쇼가 담아낸 청춘의 푸른 활기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미야케 쇼가 담아낸 청춘의 푸른 활기
  • 오세준
  • 승인 2020.04.22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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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감독이나 배우, 장르에 상관없이 일본영화는 약세였다. 흥행성적뿐만 아니라 화제성에서도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는 일본의 경제 보복(무역 규제)에 따른 국내 일본 불매운동 여파가 작동한 탓이다. 그러나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세계적인 감독들의 신작들은 불매운동과는 별개로 국내에서 나름 강력한 팬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마음을 빼앗지 못했다. 작품성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2018)와 이시이 유아 감독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정도가 평단이나 시네필들 사이에서 회자가 될 뿐이었다. [물론,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하나레이 베이>(2018)나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신문기자>(2019)도 넣어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극장 상황과는 별개로 국내 영화제에서(전주‧부천‧부산) 소개된 일본 영화들 중에는 매력적인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야마모토 아키라 감독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줘>(2018), 타나카 세이지 감독의 <멜랑콜릭>(2019),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온다>(2018), 나카가와 류타 감독의 <비가 그친 후>(2019) 또 일본의 젊은 여성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 영화 <21세기 소녀>(2018)까지. 이들을 특정한 경향으로 묶거나 새로운 흐름쯤으로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작품들이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미학적 성취를 위한 도전을 한다는 점이 얕게나마 교집합으로 묶어 볼 수 있겠다.

혹은 최근에 개봉한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의 <사랑이 뭘까>(2018), 리 토시오 감독의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아내가 죽은 척을 하고 있다>(2018)까지 생각해 본다면, 최근의 일본 영화들은 남녀 또는 가족‧부부의 사랑이라는 주제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이 미약하게나마 눈에 띈다. 이것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듯 다가오지만, 반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필자의 이 긴 서론은 작품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학적 성취의 근거를 드러내고자 하는 발판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관객인 우리가 여전히 일본 작품에 집중해서 봐야 하는 필요성이자 관심으로써.

 

사진 ⓒ IMDb
사진 ⓒ IMDb

 

2.

(...) 이윽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날을 맞닥뜨리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아무런 성취도,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인생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당연히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행복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 中 '기노', P226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미야케 쇼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3명의 청춘 이야기다.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짧은 여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사실 행복이란 게 길면 좋겠지만, 영화의 주제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촬영 기간 내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짧은 여름을 어떻게 만끽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촬영했다"라고. 공교롭게도 감독의 이런 생각은 "난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라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주인공 '나'가 똑같이 말한다. 감독의 말을 빗대어 보자면 영화 속 '나'의 말은 "난 이 행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라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름 아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품고 있는 행복 말이다.

앞서 감독이 언급한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인 우린 잠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 하코다테 어느 도시의 밤. 무단결근을 한 채 영화를 보고 태연하게 나오는 '나'(에모토 타스쿠)는 집으로 가던 중 하필 점장과 마주친다. 그러나 점장은 그를 혼내기는커녕 앞으로는 이러지 말라며 조용히 타이르고 사라진다. 그 순간 점장과 함께 있던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가 '나'의 팔뚝을 살짝 터치한다. 묘한 느낌을 받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120초를 샌다. 숫자가 120을 향해 다다르는 순간 활짝 웃는 미소를 머금은 사치코가 다시 나타난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10시쯤 한 술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지지만, '나'는 늦잠을 자고 그녀와의 약속이 아닌 같이 사는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와 함께 술을 마시러 나간다.

다음날 사치코는 나에게 왜 술집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잠이 들어서 깜빡했다고 말한다. 천연덕스러운 그의 모습이 영 밉지 않은 사치코.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한다. 한편 시즈오는 두 사람이 집에서 섹스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다. 분명 같이 사는 입장에서 불쾌할 수 있지만, 시즈오는 그런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사치코와 금세 친해진다. 세 사람은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와 다시 또 술을 마시며 아침까지 함께 어울린다. 도시 안을 채운 푸른 불빛 속에서 그들은 마치 끝이 없을 것처럼 즐긴다. 도로 위를 걷고, 당구를 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작디작은 그들의 일상들이 영화를 채운다.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관계', 영화를 지탱하는 힘

세 번쯤 영화를 보았을 때, 직감적으로 가장 빠르게 느낀 것은 '결코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편의점에서 그들이 장을 보는 장면은 2분여 가까이 3개의 롱테이크로 채워 넣는데, 이 시퀀스와 같이 영화는 세 사람의 일상을 끊임없이 조명하지만, 다분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이들의 이러한 자유로운 생활 속의 모습들이 반드시 필요한 듯한 느낌을 준다. 세 사람의 교감은 그들이 가지는 감정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객인 우리가 천천히 느끼고 채워가게끔 한다. 여기서 그들을 응시하며 느끼는 관객의 감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감정은 분명히 감독이 의도한(혹은 원했던) 연출의 결과물이다.

'연출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결국 '나'와 사치코 사이에 들어온 시즈오라는 관계(또는 '나'와 시즈오 사이에 들어온 사치코)를 지켜보면서 드는 감정, 즉 관객 개개인이 가지는 이 주관성을 뜻한다. 남녀의 삼각관계를 보면서 관객이 가지는 익숙함과 기시감, 또 언제라도 불륜‧치정극으로 분위기가 바뀔 듯한 변곡점을 기대하는 관객의 기다림.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이러한 관객의 주관성을 이용해 극을 끝까지 이끌어간다. 미야케 쇼 감독은 남녀 관계라는 구조를 사용해 재밌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 시도에는 "어떻게 하면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고민은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영화 초반 '나'와 사치코의 섹스가 끝나고 '시즈오'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고, 조금씩 대화를 나눈다. 그때 카메라는 '숏-리버스 숏'이 아닌 '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 장면은 이질적이지 않지만, 조금 어색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치코와 시즈오의 표정은 오로지 '나'의 얼굴로 추측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질감은 영화 속에서 여럿 확인할 수 있다. 시즈오의 옷을 입고 귀가하는 사치코의 모습(후에는 다시 그 옷을 시즈오가 입고 사치코를 만난다)이나 시즈오와 사치코 단 둘이 노래방에 간 상황에서, 시즈오의 클로즈업은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치코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노래가사가 나오는 화면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조금씩 사치코의 얼굴을 담아내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필자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부분은 세 사람이 함께 클럽에서 노는 장면이다. 감독은 무려 8분이라는 시간을 할애한다. 여기에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모든 느낌과 감정들이 담겨있다. 푸른빛의 조명 아래서 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리듬에 몸을 맡긴 채 흔들고, 술을 마시며 당장 다가올 아침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보낸다. 또 여기에는 젊음을 느낄 수 있는 행복이 가득하다. 이때 관객인 우린 영화가 표출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에 현혹되어 정작 세 사람의 관계를 잠시 잊는다. 이 시퀀스에서 필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각각 혼자 있을 때와 더불어 '나'와 사치코, 시즈오와 사치코, '나'와 시즈오 등, 클럽 안에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 사람의 모든 관계성은 그것이 '멜로드라마'에서 완벽히 제외된 독립적인 형태로, '즐거움'이라는 하나의 감정만이 지배한다.

'친구나 연인' 따위를 형성하지 않고, 확신과 모호함 사이의 경계 안에 그들을 가둔 채,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가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전복시켜 버린다. '완벽히 어우러졌다'라는 말에 무한으로 수렴하는 꼴이다. 그래서인지. 이 기점으로 영화는 점점 더 세 사람을 '교묘하게' 섞는다. 감독의 이러한 연출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연속성'에 대한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필두로 106분이라는 런닝타임을 채울 수 있는가. 아니. 적어도 1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행복'한 끌림

여기서 필자는 질문을 던진다. '세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이들의 등장을 생각해보자. 무료하고 권태로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떤 하루쯤을 보내고 있는 듯한 세 사람. 특히, '사치코'의 첫 등장은 어두운 그림자가 반쯤 채워진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이러한 그들이 폭발적으로 바뀌게 되는 건 위에서 언급한 '클럽 안에서 노는 모습'이다. 이때 감독은 클럽을 가득 채우는 DJ의 음악 속에서 홀로 춤을 추는 사치코의 모습을 담는다. 이 순간 그녀의 몸짓은 자유를 열망하고 낮의 일상을 잊으려는 듯 다가온다. 이는 노을빛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버닝>의 혜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어 술을 마시며 셋이서 자유롭게 리듬을 타는 모습은 이 영화가 담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함께 아침을 맞이한 그들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건 섹스 후의 '나'와 사치코, 더불어 어느 가게 안에 시즈오의 모습이다. 사실 이 숏의 연결은 상당한 시간적인 결핍을 가진다. 그럼에도 관객인 우리가 어떠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우린 조금은 의아해할 수 있다. 시즈오가 '나'와 사치코 사이에 끼어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혼란스럽게 해야 하지만, 영화는 결코 그러한 통속극의 전형성을 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익숙함을 감독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딱 그 순간의 숏을 '나'와 사치코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순간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시즈오는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이와 같은 전개의 끝을 보여준다. '나'와 함께. 바로 사치코와 스즈오 단둘이 캠핑을 떠나는 일. 그러나 감독은 두 사람이 캠핑을 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는다. 재밌게도 그의 일상은 영화 초반과 다르게 상당히 쓸쓸한 모습이다. 그는 느끼지 못하지만, 관객은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렇다. 우리는 이미 눈치채고 있다. 그에게 '사치코'의 부재는 더는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을.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중반부를 넘어 1시간 넘게 달려온 우린 '무엇'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표방하지도 심지어는, 장르를 변주했다거나 구조의 틀이라는 것을 가져왔다고까지 말할 거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떠오르는 전형성에 따른 예측이나 추론 따위가 세 사람의 관계를(삼각관계라 부를 만한 것) 형성하는 데 있어서 결코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답을 찾고자 함에 1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세 사람의 관계가 아닌, '나'와 사치코, '사치코'와 '나' 그리고 '시즈오'와 '그의 엄마' 이렇게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행복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행복이 아닌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와 같은 고민 안에서 형성됐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가 가진 고민, 이것을 서로에서 털어놓는 것이 아닌, 자신이 깨닫고 해결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어머니의 병실에서"병원 냄새를 참을 수 없다. 친구들과 단골로 갔던 장소의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시즈오의 고백과, 떠나는 사치코를 붙잡고 진심으로, 또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나' 모습을 담은 결말을 통해서.

그렇다면 다시, '세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철학자나 지성인의 견해를 찾아봐야 할까. 글쎄. 필자는 단순하게 '끌림'이라 부르고 싶다. "그들은 그냥 마음이 맞아서 끌렸다"라고. 누군가에서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보이는('나'), 경제력이 없어 가족에게 돈을 빌리는(시즈오), 또 자신에게 사랑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사치코), 이들에게는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행복을 느낄 순간이라고 해야 더 좋을까. 그 순간을 어떻게하면 더 느낄 수 있을까.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행복'이라는 느낌적인 느낌, 미야케 쇼 감독은 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을-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인지도 모르는 것-인물들을 화면에 담는 방식과 몽타주로 형식적‧미학적 성취를 이뤄낸다. 세 명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관객이 느끼는 청춘에 대한 이유 모를 감정은 감독이 조립한 이미지들의 연결의 산물인 것이다. 관객인 우린 이 영화를 더 여유롭게 더 길게 여운을 가지며 즐기고 싶은 욕망을 깨운다. 세 인물이 그들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감독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관객인 우리가 그의 작품을 더 응시하도록 발현하는 묘한 경험을 전한다.

더 응시하고 싶은 이 감정,  이것은 '행복'을 더 간직하고 즐기고 싶은 영화를 만든 자, 영화 속에 사는 자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이 작품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어쩌면 관객인 우리도 알게 모르게 주인공들에게 끌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세 사람은 삼각관계 안에서 서로가 어떤 사이인지 정의하지 않은, 확신과 모호함의 끝자락, 비로소 여기에 우린 청춘이란 것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젊음이란 것이 없어지는 것인지 아닌지, 영화의 시간은 주인공의 세계를 지탱하고, 관객의 응시를 맞이하며, '영화 속 주인공들이 짧은 여름을 어떻게 만끽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생각과 시도를 온전히 반영한다.

 

배우들과 미야케 쇼 감독, 사진 ⓒ 디오시네마
배우들과 미야케 쇼 감독,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사진 ⓒ 디오시네마

청춘의 밤은 왜 이토록 푸른빛을 내는 것인지. 언제나 태양의 빛을 피해야 하는 것인지. 청춘, 그 자신들의 시간은 왜 그토록 낭비되고 버려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자유롭지만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걱정은 마치 모텔방에 숨어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모두가 잠든 시간 땅 아래에서 크게 울리는 음악에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처럼, 사라져가는 것에 무감각해지기로 한 듯 지칠 때까지 떠들고 웃고 모든 에너지를 토해낼 때까지 행복함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 아닌지.

'나'의 고백을 들은 사치코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찰나 끝나버리는 영화의 마지막처럼,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관객인 우리에게 고백한다. 영화관을 나가도 '행복함'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듯.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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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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